오늘은 3월 6일 요한복음 6장을 읽었다. 매우 길고, 위험한 사건이 등장한다. 설교가 너무 어려웠나? 5천명이 몰려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고, 가버나움 회당까지 따라온 무리가 모두 떠났다. 생명의 떡 사건이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말씀 때문이다. 실제 이 내용은 ‘식인종교’의 오해를 낳게 된다.
공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본다. 요한복음은 마귀의 3대 시험이 없다. 대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한다. 사탄의 시험문제는 ▲떡문제 ▲능력문제 ▲권력문제였다. 오병이어는 3가지가 모두 함축된 사건이다. 요한복음 6장 6절에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했다.
5천명이 들판에 모였다. 대부분 굶었다. 빌립에게 물으니,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빌립은 현실적 계산기였다. 반면, 안드레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꺼내놓는다. 이런 황당한, 무대책의 안드레가 어디에 있을까? 200데나리온은 2천만원이다. 2천만원을 어디선가 구해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야할텐데, 안드레는 어떤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와서, “선생님, 이것 드세요”라고 한 것이다.
2가지 종류의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현실을 직시하는 빌립형, 하늘을 직시하는 안드레형이다. 현실만 직시하고 계산기만 두드리면, 빌립은 움키고, 소유한다. 반면,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안드레처럼, 여호수아처럼 좋은 쪽만을 본다. 2가지 모두 필요하다.
안드레처럼 좋은 것이 무조건 좋다고 하다가는 권력의 폭풍앞에서 모두 도망친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의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고, 그것을 영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졸았다.
정읍에 가면 소나무들이 엄청 많다. 한그루에 1천만원~1억원을 넘어선다. 반면, 가평은 철쭉이 유명하다. 한그루에 1만원~3만원이다. 얼핏보면 정읍에 있는 소나무 사장들이 부자일 것 같은데, 가평의 철쭉 사장이 부자다. 정읍은 겉만 화려하고, 속은 곪았다. 왜냐면, 소나무가 팔리지 않아서 그렇다. 철쭉은 싸니까 사람들이 계속 밀려온다. 그러다보니, 철쭉을 팔면서 철쭉 사장들이 오히려 소나무까지 1~2그루 판다. 철쭉 사장은 빌립처럼 현실을 직시한 것이고, 정읍은 안드레처럼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오병이어 도시락’밖에 없는 것이다.
크게 하는 것도 필요하고, 작은 것도 필요하다. 모든 것을 따져봐야한다. 빌립과 안드레는 2개의 눈이다.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서 다시스로 가는 큰 배에 ‘구원’을 선물했다. 요나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폭풍을 만났으나, 요나 덕분에 그들은 평생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다. 니느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서 요나를 전도하신다. 하나님은 오히려 요나의 회심에 관심을 갖는다. 겨자씨처럼 작지만, 그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셨을까? 제자들을 시험하고, 교육하기 위함이다. 계산기를 두드린 빌립은 예수님의 통치력에서 놀랬을 것이고, 도시락을 내놓은 안드레도 예수님의 통찰력에 놀랬을 것이다. 2천만원과 도시락 1개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 현실에 직면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예수님처럼 해야한다. 오병이어 도시락을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하셨다. 그리고, 잔디밭에 50명씩 소그룹을 100개로 나누고, 제자들을 2명씩 짝을 지어서, 소그룹 모임을 하신 것이다. 그곳에서 똑같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빌립형”과 “나눔을 알고서 베풀줄 아는 안드레형” 인물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렇게 뽑힌 인물들이 70문도가 아닐까?
12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말은 12제자들에게 70문도를 연결해서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베품을 아는 빌립과 안드레가 합쳐지는 ‘사랑의 공동체’다.
마귀의 2번째 시험문제에서 ‘진정한 능력’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잠시 참고, 집으로 가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해결책이다. 예수님은 그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각자 꺼내서 서로 나눠먹기다. 나눔이 곧 능력이다. 안드레가 도시락을 꺼내놓듯이 서로 나누는 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계산기만 두드리면, 현실을 직시하면서 해결을 못한다. 빌립형이다.
마귀의 3번째 시험문제로서 ‘권력시험’은 요한복음 6장 15절에 나온다.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아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고 했다. 5천명이 모인 무리의 회장이 되거나, 백성의 임금으로 추대된다고 해서 무엇하랴!!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나눔과 사랑’으로 온전해지길 바라셨다. 권력시험이 올 때는 그곳을 떠나서 산으로 가는 것이다. ‘홀로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세상 임금이 되는 것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