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의사소통은 ‘정보전달’에 있다. 마치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의 답장을 받는 것, 그것을 의사소통으로 봤다. 정보의 본질(텍스트)를 방해하는 소음을 모두 제거하면, 정보전달에 있어서 ‘오해와 편견’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가 오해하면, 설득하려고 다양한 비유와 방법을 동원한다.
의사소통의 본질은 A와 B의 존재에 있다. A는 화자, B는 청자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시소처럼 계속 바뀐다. 탁구공을 주고받듯이 그렇다. 이때 말은 탁구공인데, 탁구대의 탁구공은 1개이지만, 대화속의 탁구공 역할을 하는 “말”은 사람의 머릿속으로 쑥 들어간다. 이것이 상호교섭이다.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탁구공이 탁구대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A는 한국인, B는 베트남 여성이라고 하자. 둘은 농촌 총각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로 ‘국제결혼’을 했다. 둘이 과연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최소한 한글과 몸짓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하자. 이때, A는 B에게 한국에 있으니, 한국문화를 따르라고 강요한다. “시집을 왔으면, 시댁 귀신이 되어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A는 A고, B는 B다. 베트남에서 살았던 과거의 모든 삶이 B에게 있고, A는 한국에서 살았던 모든 삶이 한국에 있다.
둘이 사소한 대화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았던 인생이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표면은 ‘몇마디 말’이지만, 내면은 ‘살아온 인생 전체’가 담겨져 있다. 마치 나무의 뿌리는 땅속 깊이 내려져 있듯이, 모든 인생은 과거의 뿌리가 존재한다. 이것을 반드시 인정해야한다. 텍스트는 결국 1%에 불과하다. 어떤 정보도 상대방에게 건너가면, 상대방의 인생속에서 희석된다. 소금처럼!!
나는 오늘 요한복음 8장을 읽었다. 실제로 간음한 여인이 붙잡혔고, 예수님이 그 사건을 해결했다. 훗날 요한이 그 사건을 설교했을 것이다. 설교를 들었던 누군가 그것을 기록했고, 요한복음으로 편집되었다. 1)예수님의 관점 2)요한의 관점 3)요한공동체의 편집자의 관점이 각각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까페에서 내가 살았던 모든 삶을 통해 요한복음 8장을 들여다본다. 아무리, 요한복음 8장은 8장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미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으로 해석할 뿐이다. 이것이 청자와 화자의 인생을 존중하는 의사소통이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으면, “공의로운 예수님”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유대인은 정반대다. “자격도 없는 나사렛 청년이 왜 종교 지도자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가. 십자가는 마땅한 천벌이다”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한다. 정반대다. 대한민국은 “핵무기를 가지고 협박하는 깡패집단 북한”으로 생각하는데, 북한은 “핵무기로 미국에게 할말 하고,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북한정권, 민족의 자존심을 미국에 팔아넘긴 남한”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논리다. 이렇게 다르다.
오랜만에, 남편은 휴가를 얻었다. 지방출장을 다닌다고 너무 피곤하고, 가끔 해외출장을 다녀오면, 사는 것이 고달플 정도다. 오랜만에 얻은 휴가에 남편은 기분이 들뜬다. 그래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이번 주말부터 휴가야. 가족끼리 멋진 휴가를 보내”
그 문자를 받은 아내도 행복에 빠졌다. 날마다 자녀들 양육하랴, 집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감옥같았다. 남편과 함께 강원도나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길 꿈꾸면서, “이번에 가족끼리 행복한 휴가를 보내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날, 저녁, 부부싸움이 일어났다. 휴가 때문이다.
휴가(休假)는 쉴 틈이다. 남편은 직장을 벗어나서 이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휴가’로 본다. 반면, 아내는 집안과 가족을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여행하는 것을 ‘휴가’로 본다. 아내는 집을 벗어나야하고, 남편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어한다. 둘은 ‘휴가의 언어’를 같이 사용하는데, 그 의미가 정반대다. 아내의 휴가는 ‘여행’이고, 남편의 휴가는 ‘가족’이다. 이것을 모른 부부는 “우리는 정말 대화가 안돼요”라면서, 휴가를 부부싸움으로 망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해야한다. 이것이 화법의 기본원칙이다.
아내는 남편의 휴가를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통해서 남편이 아내의 휴가를 이해하도록 대화를 충분히 나누는 것이 곧 대화의 기술이다.
편견은 곧 인식관이다. 편견은 누구에게나 중력처럼 존재한다. 남편은 남편의 인식관이 있고, 아내는 아내의 인식관이 있다. 달은 달의 중력이 있고, 지구는 지구의 중력이 있고, 태양은 태양의 중력이 있듯 그렇다. 너무 강한 중력의 인식은 ‘우상’이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에게 결합한 우상의 하만을 제거할 때, 3번의 잔치를 초대하면서, 아하수에로 왕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부부끼리 대화를 할 때는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남편은 아내가 집에 갇혀 있음을, 아내는 남편이 직장에 갇혀있음을, 서로 인정하면서 대화를 나누어야한다. 이것이 의사소통의 상호교섭 작용의 기본원칙이다.
추천도서 : 조직갈등관리(심리학적 갈등조정을 중심으로 – 문용갑, 학지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