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므나의 겨자씨가 나무가 되기까지
십자가 사건을 직면했을 때, 예수님은 주민세(성전세) 5만원을 내지 못했고, 베드로가 체납사실을 전달하자, “왕자의 면책특권”을 비유로 알려줬다. 그리고, 백지수표를 내밀 듯, “빌려서 대신 내주렴”이라고 하셨다. 궁핍과 가난의 대명사로 주님은 살으셨는데,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셨을까? 당시 렌트카인 나귀를 빌려오실 때도 ‘말’로 해결하셨다. 그 당당함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자의 비유가 나온다. 15억원, 6억원, 3억원의 투자를 받은 사업가들의 이야기다. 예수님의 비유는 차원이 다르다. 씨뿌리는 비유처럼 생활저변에 밀착되어있으나, 단위가 다르다. 마태가 ‘0’을 몇 개 더 붙인 것일까? 누가는 같은 설교에서 10명의 종을 등장시켜서, 각각 1므나를 받았다고 기술한다. 1므나는 100세겔이다. 1세겔은 10만원이니, 1므나는 1천만원이다. 베다니 마리아는 3므나에 해당하는 3천만원 결혼자금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마태복음의 종들은 투자금이 각각 다른데, 누가복음은 평등하게 1천만원의 투자금을 받았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수익을 남긴 종이 2명 나온다. 1므나 받은 종이 10므나 수익을 남겼다. 1천만원으로 1억원 수익을 남긴 것이다. 그랬더니, 돌아온 주인은 권력자로서 10고을을 맡겼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인의 즐거움’이 누가복음에서는 ‘관직’으로 구체화된다. 1므나로 5므나를 남긴 종은 5천만원 수익을 남겼다. 이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었다. 마태는 한 달란트(3억원)으로 기술했는데, 누가는 한 므나(1천만원)으로 적었다. 누가는 돈에 있어서 대범하지 못한 것일까? 놀랍게도 누가는 10므나를 ‘10 고을’로 확장한다. 영토를 다스리는 권력에 있어서 누가는 상당히 대범하다. 마태는 ‘주인의 즐거움’으로 모호하게 말했다. 예수님은 동일한 설교를 했을 것인데, 제자들마다 생각의 깨달음이 깊이와 방향이 전혀 달랐다. 어떻게 꿈꾸느냐, 어떻게 행하느냐이다.
맡은 것이 겨자씨처럼 ‘100원’에 해당할지라도, ‘100억원’과 같다고 믿고서 정성을 다해야한다. 과연, 주님이 제자들에게 3억명을 맡겼는가? 6억명을 맡겼는가? 15억명을 맡겼는가? 40일 동안 엄청난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 승천하시기전에 겨우 500명 모였다. 제자들이 발품해서 모인 숫자가 겨우 500명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 “하늘 이끝에서 저끝까지 모으듯” 40일간 모은 숫자는 500명이고, 실질적 신앙인은 70명 남짓 되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에게는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다. 그것이 다섯 달란트일 수도 있다. 예수님 가족은 다섯명 정도인데, 15억원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생명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상대적으로 겨자씨로 보일 뿐, 생명은 최소한 3억원 이상이다. 50명 교회는 150억대 기업이다. 이런 포부를 가지고,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살아야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질적 철학이다.
1000냥 하우스가 있다. 상당히 저렴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부활해서 1000냥 하우스를 발견하면, 감히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비싼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냥을 1원으로 생각한다. 1냥은 2만원이다. 1000냥 하우스는 2천만원 상품 판매소이다. ‘냥’의 가치하락이다. 돈의 개념은 이와 같다. 어찌 생각하느냐로 완전히 달라진다. 허풍을 떨 듯 허세를 부리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면서, 작은 것도 크게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명, 6명, 15명 교회를 맡기셨다. 그러면서, 3억명, 6억명, 15억명을 맡긴 것처럼 말씀하셨다. 1 생명이 그만큼 귀중하다는 것이다. 생명은 너무 너무 너무 귀하다.
5천명이 예수님을 따르자,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님은 50명씩 100개로 나누었다. 작은 신앙공동체로 나누신 것이다. 50명 교회가 되어야 목회자는 양들의 이름을 외우고, 돌보고, 살피고, 울음을 알아듣는다. 주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고, 무리를 흩으셨다. 그리고,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다. 결국, 하나님을 각자 찾도록 신앙심을 넣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12명의 생명 겨자씨를 품고서, 11명의 결실을 이루셨다. 1명이 곧 미래의 100억명이다. 이것이 믿음의 확장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면서, “창공을 보라”고 하셨다. 아!!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와 보는 방향과 깊이가 확실히 다르다. 뭇별처럼 많은 후손(창세기 15:5)을 약속하고, 하나님은 이삭 1명만 줬다. 이삭이 곧 뭇별을 품은 독생자인 것이다. 1명이 뭇별만큼 귀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키울 때, 야곱을 통해서 11명의 형제들을 감찰하는 사명을 주셨다. 요셉은 형들의 모함을 받을지라도 충성스럽게 맡은 역할을 다했다. 그래서 형제들의 누명을 쓰고 버림받았다. 보디발 장군을 통해서 장군의 집을 관리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때도 요셉은 충성스럽게 일했다. 야곱의 집안일이 장군의 집안일로 확장되었다. 사모님의 유혹을 거절할 정도로 야물지게 행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감옥 전체의 살림을 맡아서 처리했다. 결국,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총리대신이 되었다. ‘꿈을 해석함’을 ‘해몽’으로만 인식하면, 인생은 잠만 자야한다. 해몽이 아니다. 꿈풀이의 작은 기회를 통해서, 요셉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관리감독의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면 그러한 감투를 줘도 못한다.
글쓰기의 명언으로 “일기를 쓰는 자는 모두 필력이 좋다”는 격언이 있다. 날마다 써서 그렇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면서, 글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내가 다니는 새로운 교회는 주일예배, 수요예배의 말씀이 매번 새롭다. 같은 본문을 가지고서도 깊은 맛의 요리를 만들어내신다.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설교자의 산고(産苦)가 있음으로 생명력있는 감동을 성도는 받는다. 깨달음은 허공의 영감에 있지 않고, 고뇌하는 지성에서 겨자씨로 올라오는 것이다. 아멘!! 나는 오늘도 1므나의 겨자씨를 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