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말하길, “구약은 예언했고, 신약은 이뤘다”고 말한다. 어리석고, 어리석고, 어리석은 해석이요, 설명이다. 전혀 아니다.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아는 자신들의 살던 정치사회와 투쟁했고, 행했고, 이뤘고, 변혁했고, 하나님을 나타냈다. 행동하는 예언가였다. 그들 스스로 행동의 예언을 했으며, 그 삶이 예언서가 되었다.
“너는 알몸으로 살라. 벗고서, 맨 몸으로, 맨 발로 3년을 돌아다니라”고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사야는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3년동안 노숙자 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맨 정신으로, 알몸 행진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쳐다볼 그 수치와 치욕과 모멸을 견디면서, 이사야는 말씀을 실천했다. 3년의 기간이 끝나고, 이사야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알몸으로 끌려가리라” (이사야 20장)
이것이 징조와 예표의 행동적 예언이다. 이사야 개인의 3년 알몸 행진이 이집트의 멸망을 예언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7일동안 평화롭게 행진했다. 조용한 행진이 난공불락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이것이 행동하는 예언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그 시대에 이미 성취되었다. 먼훗날 예수님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세상 권력은 사람이 성취하고, 하나님의 권력은 믿는 자가 겨자씨로 행하고, 그 실천을 딛고 하나님이 행하신다. 이사야의 3년 알몸 행진을 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라. (시편 37:4)
이사야는 자신의 시대를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영적 뉴스를 보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영성을 백성에게 불어넣었다. 창세기 1:2처럼 혼돈된 땅과 공허한 흑암이 매우 깊은 정치와 종교의 현실앞에, 백성의 어리석음을 목도하면서, 이사야는 수면위에 불어가는 성령의 바람처럼 예언의 말씀을 외친 것이다.
골방에서 홀로 외친 기도의 소리가 이스라엘의 공허한 정치세계위로 날아갔다. 이것이 예언이다. 확성기로 떠들지 않아도, 이사야는 기도하고, 기록하고, 믿는 몇몇 제자에게만 들려주고, 그 시대를 위대한 침묵으로 살아냈다.
이사야는 앗수르 20만명이 침공했을 때, 히스기야 왕을 독려하면서, “이길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이겼다. (열왕기상 18장~20장) 하나님을 대적한 산헤립은 그의 신전에서 죽었고, 하나님을 붙잡은 히스기야는 죽음의 병에서 살아났다. 이사야가 위기의 순간마다 함께 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는 거짓 선지자 450명을 숙청했고, 그 결과 하나님은 비를 선물했다. 우상숭배자를 죽인 것이 곧 기우제가 되었다. 악의 진멸은 하나님께 열납(悅納)된다. 엘리야는 패역한 이스라엘이 바뀌지 앉자, 모세가 여호수아를 교육하듯, 엘리사를 특별히 교육시켰다. 엘리야의 영적 계보를 물려받은 엘리사는 제자들을 양성했고, 예후 장군은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아합정권’을 초토화시켰다. 예언자들은 각각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를 변혁하고, 말씀을 행위로 살아냈다. 이것이 곧 성경이다.
사람을 무조건 믿으면 낭패다. 엘리 두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대제사장인 것을 믿고서, 위대한 사사인 것을 확신하고, 범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언약궤를 메고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멸했다. 언약궤까지 블레셋에 빼앗긴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다. 눈멀고, 귀먼 엘리를 믿은 결과다. 참혹했다. 아담은 돕는 배필의 조언을 믿었다. 그리고 타락했다. 아담의 변명이 이것이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 에덴동산에서 발생한 비극이다. 아담도, 하와도,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중매를 섰고, 부부가 되었고, 에덴동산까지 선물로 줬다. 그런데, 타락했다. 결국, 에덴동산을 뺏겼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 믿는 종교 지도자가 구원을 돕는 배필이면 어쩌랴!! 선악과는 곧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스승의 눈이 멀었으면, 스승의 눈을 뜨게 하던지, 스승을 버리던지, 결정해야한다. 아둔함으로 예언자의 소명에 실패한 세례요한 밑에서 과감한 결단을 한 두 인물이 있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예언을 받았으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적극적 증거자가 되지 못했다. 놀랍게도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자신의 스승을 버리고, 새로운 스승으로 예수님을 택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한복음 1:35~42)
왜 바울이 위대한가? 그는 지금의 국회의원이요, 현직 검사 출신이다. 기독교인을 체포하는 ‘구속영장’을 가지고 다멕섹으로 출동한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그곳에서 ‘빛의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의 무지가 들통났다.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가말리엘을 스승으로 섬겼다. 바울은 그 사건으로 스승을 ‘죽은 예수’로 바꿨다. 권력을 가진 유대교를 버리고, 핍박받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개종을 반대하는 아내와 이혼하고, 3년을 고뇌하며 살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어떠한가? 성경은 이것 하나를 묻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
내가, 그가, 백성이, 시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