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배치를 완전히 바꿨다. 개혁은 책장에서 시작했다. 가로로 눕혀진 책장을 세로로 세우고, 낮은 책상은 높이고, 높은 책상은 낮추고, 구석에 있던 책꽃이는 내놓고, 펼쳐진 책들은 세우고, 바닥에 있는 것들은 위로 올리고, 위에 있는 먼지는 제거하고, 숨겨진 것들은 꺼내고, 익숙한 것들은 결별이다. 오직, 성경이 내 우편에, 펜과 잉크는 좌편에 위치한다. 공허한 바닥위로 청소로봇이 움직인다. 아!! 나의 청소로봇은 성령의 바람이다. 그리고, 벧엘의 고요함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내게 십자가의 은혜가 느껴지는 이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지, 덤으로 누가 무엇을 더 준다고 해도, 나는 십자가를 붙들기로 작정했다. 십자가는 기본이고, 덤으로 더 준다면서 따라간 지난 30년, 나는 십자가를 뺏긴줄도 모르고 살았고, 점점점 성경도 뺏기고, 기도도 뺏기고, 성령도 뺏기고, 신앙도 뺏기고, 구원도 뺏기고….. 점점점 그렇게 소돔의 소금기둥이 되어갔다. 나는 내가 떠난 곳이 어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무감각으로 굳어버린 내 신앙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나를 망치로 내려쳤다. 내 안에서 깨지지 않는 내 강퍅한 사상의 우상은 ‘세뇌된 교리의 아둔함’이다. 그것은 너무 견고한 철옹성이고, 아이성이고, 여리고성이고, 아모리 연합체다. 하나님께서 망치로 나를 내리치니, 나는 깨진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매일 죽노라”의 의미를 조금 알 듯 하다.
나는 오늘 나의 장례식을 치르듯, 애곡했다. 너무 슬프고 슬프고 슬프다.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까? 누가 나의 장례식을 치러줄까? 나의 죽음을 내가 목도하고, 십자가를 받아드린다. 어떤 표현이 아니다. 내가 내 집의 가구배치를 다시하듯,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가구배치를 다시 하셨다. 구석에 버려진 십자가를 가운데 세우시고, 중앙에 있던 것들은 멀리 버리시고,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을 치환하시고, 과거의 것들을 분서갱유하듯 아프게 묻고, 장사지냈다.
내가 죽은 나의 장례식은 애도의 기간이다. 내가 나의 장례식을 치르며, 진지하게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덤으로 더 주겠다는 덤의 독이 곧 뱀의 독인 것을, 덤독을 나는 정녕 주의하고, 경계하고, 십자가를 붙들기로 다짐, 다짐, 다짐했다. 덤은 없다. 오직 십자가다. 뱀은 덤으로 선악과를 더 주겠다면서, 결국 모든 에덴동산을 뺏었다. 덤의 보이스 피싱을 조심해야한다.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 성령의 감동이 미세하게 들려오는 것, 기도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는 것, 같은 신앙의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내가 사는 집과 생활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얼마나 가치있는 인생인가? 덤의 독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진리로 인생을 살리라. 살면서 나의 죽음을 맞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