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을 때, 생명력을 가져야한다. 교주고슬(膠柱鼓瑟)하면 안된다. 교주고슬은 음을 조율하는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인 다음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말로서, 이론을 달달달 암기하고서 대장군에 임명된 조괄 장군의 패망을 비유한 사자성어다. 완벽한 30개론, 완벽한 이단의 교리가 곧 그러하다.
그들은 성경해석에서 탁월한 논증을 교리로 고착시켰고, 아교로 붙이듯 절대진리로 고정했다. 교주고슬이다. 교주고슬로 고정된 진리를 배운 자들은 ‘구구단’만 암송할 뿐이다. 구구단은 사칙연산을 풀기 위함인데, 그들은 현실의 사칙연산은 풀지 못하면서, 계속 구구단만 암송한다. 슬픈 비극이여!! 내가 교주고슬의 음치였다.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배우면,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면, 사건과 사건의 맥락을 연결해서 본문 텍스트를 깊게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면, 기존의 지식이 ‘벽’에 갇혔음을 깨닫게 되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간절히 염원하면, 성경은 진리의 문을 열어준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인도자가 된다. 또한, 그때 깨달은 것이 변하지 않는 절대진리로 생각하면 안된다. 절대진리는 오직 성경 자체다.
사람도 살아서 움직이듯, 성경은 그 속에서 지금도 계속 숨쉬며,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생명으로 살아있는 성경의 품속에서 우리는 재탄생한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곧 ‘성경의 품속에서’ 인생의 생각은 다시 태어난다.
[누가복음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에스더 4: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으로 단절되고, 버려짐을 당했고, 모르드개와 하만은 권력적 ‘부익부 빈익빈’으로 단절되고, 억울함을 당했다. 대궐문이 높듯, 궁궐문은 높았다. 거지가 아무리 두드려도 개들만 나왔고, 모르드개가 아무리 국민 신문고를 울려도 쳐다보는 공무원이 없었다. 1인 시위와 1인 구걸은 언제나 소외와 외면과 냉담이다.
그때, 에스더는 부자의 자색옷을 입고 있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권력의 궁궐에 있던 자들중에서 왕비 에스더는 ‘슬픈 모르드개’의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에스더 본인의 사건임을 알게 된다. 거지 나사로의 헐벗음은 부자의 헐벗음이었다.
그리고, 에스더는 ‘입을 의복’을 보냈으나, 모르드개는 거절하고, 그 슬픈 사연을 전한다. 하만은 우상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결코 자본주의의 정의가 아니다. ‘빈익빈 부익부’를 유지하려는 부자의 탐욕이 곧 하만의 절대권력과 흡사하다. 돈이든, 지식이든, 권력이든, ‘부자’에 속하면, ‘가난한 자’에게 나눠줘야한다. 예수님은 분명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다. 많이 가진 자들이 움켜쥐면서 사회적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슬픈 모르드개를 위로하는 왕비 에스더의 손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모르드개의 문제가 에스더의 문제이듯, 거지의 버려짐은 부자의 버려짐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자신도 방치된다. 관심의 문을 열면, 그곳이 천국이다. 에스더처럼!! 관심갖기!! 그리고 행동하기!!
[에스더 4장]
4.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