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 오늘도 눈을 떴고, 내 기억의 메모리는 어제와 과거로 연결된다. 노트북을 켜듯, 내 인생이 다시 켜지는 이 신비함앞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다. 밖은 어둡고, 방도 어둡고, 작은 조명등밑은 밝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앞에 버려짐을 당하고, 외면을 당했으나,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살았을 때, 그 형편이 외면과 소외로 보여질지라도, 개들이 핥는 사태같아도, 개들의 핥음이 성령의 위로일 수도 있다. 외면과 소외와 버려짐의 그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요, 구원의 영광이 임할 수도 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 수 없다. 대문을 잠근 부자앞에 하나님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거지 나사로의 모습으로!!
30년의 믿음에서 추락한 그때 나는 버림을 당했으나, 그 버려짐이 새로움을 낳았다. 거지 나사로처럼, 나는 과거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을 받았다. 부활은 버려짐과 외면과 소외와 고난에서 강력한 바람을 일으킨다. 외면받을 때, 하나님은 얻음을 주신다. 거지 나사로는 빈손이었으나, 이미 아브라함의 품속이었다. 부자를 지켜줄 개들이 오히려 나사로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위로하였다.
엘리야를 대접한 까마귀처럼, 개들이 자신들의 먹을 것을 가져왔을지, 누가 알랴!! 경제적으로 누추하게 살지라도, 신앙적으로 고달프게 살지라도, 명예적으로 추락하는 늪에 빠질지라도, 그곳에 구원의 문이 있다. 대한민국은 중국과 미국의 부잣집 대문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와 같다. 거지 나사로는 개들의 핥음을 받았건만, 대한민국은 사나운 북한이 핵무기의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괴롭혔다. 개줄에 묶여서 물지 않을 것 같아도, 중국은 언제라도 개줄을 풀 수 있다고 협박한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믿을 구원의 손길이 어디에 있으랴. 산헤립의 이름으로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낸 랍사게의 오만함처럼, 우리 민족은 거지 나사로처럼 버려짐을 당해왔다. 결국, 성령의 위로를 간구해야한다. 위정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시진핑은 유럽의 이탈리아를 방문해서, 황제 의전을 받으면서 3조원에 가까운 사업을 선물했다고 한다. EU는 트로이 목마를 비유하면서 중국을 경계한다. 진실한 나눔과 베품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직접 나서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 못할 것이 무엇인가. 거지 나사로는 버려짐과 외면을 받았으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져서 싹이 나고,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듯,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외된 자들의 손길로 지금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가치를 다시 되새긴다. 내 기억의 문앞에 놓여진 귀한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복을 간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