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정감록 예언이 있다면, 이스라엘에는 창세기 예언이 있다. 여자의 후손이다. 그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고, 그것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믿지 않는 종교가 유대교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창세기 3장 예언’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하였다. 그런데, 탄생설화를 읽으면, 창세기 3장이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번역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창세기 3장을 적시하는 단어가 사라지면서 발생한 부작용이다. 마태는 요셉과 마리아의 혼인파탄 장면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파탄을 연상시키고 있다.
[마태복음 1:19_개역개정]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공동번역]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새번역]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의로운 사람인 약혼자 요셉은 마리아를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남몰래 파혼하려고 마음 먹었다. 요셉이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개역한글]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 따르면, 요셉이 약혼자의 임신사실을 소문으로 듣고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그 진실을 알게 된 후에 ‘파혼을 생각할 때’의 그 ‘생각하다’는 그리스어로 ‘enthymeomai’라고 한다. 이 단어는 ①생각하다, 심사숙고하다 ②분노하다, 화나다, 속이 뒤집히다의 뜻이 있다. 대부분 번역은 ①으로 풀이했고, ②을 배제했다. 마태의 기록은 ①과 ②를 모두 포함한다. 그동안 우리가 버렸던 ‘요셉의 분노’를 받아드리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요셉은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의 소식을 들었고, 본인에게도 확인했을 것이며,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격노한 것이다.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따졌을 것인데,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할 뿐, 함구했다. 나는 성령잉태설의 신학적 논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겪는 감정의 진실을 발설하는 것이다. 어떤 남편이 아내가 가진 다른 남자의 아이를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 백일의 낭군님이 이러한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준다. 왕자는 아내와 결코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발견하고 분노한다. 남편은 아내의 아이가 자신의 씨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요셉은 분노했으나, 그때 천사가 꿈속에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된 것을 알려준다. 인천사를 통해서도 주변에서 독려했을 것이다. 혹은 뱀처럼 ‘율법으로 정죄하고, 정의로서 범죄를 들통내 죽일 자를 죽여야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분노했으나, 그 분노를 인내롭게 ’감사와 은혜‘로 바꾸었다. 아버지가 누구든, 요셉은 자신이 태어날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에 가서 요셉의 호적에 마리아와 아이를 입적한 것이다.
분노는 대체적으로 의롭다. 그 의로움은 대부분 ’죄‘에 뿌리를 둔다. 가인이 그러했고, 요셉도 그러했다. 율법에 따라 요셉은 파혼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고통속으로 들어가라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품도록 말씀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율법이요, 정의요, 사랑이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했고, 요셉은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품었다.
enthymeomai(분노하다)가 사용된 곳은 ①헤롯이 동방박사에게 속은 것을 알았을 때(마2:16) ②예수님이 고향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을 선포했을 때, 고향 사람들이 품은 분노(눅4:28) ③점심때 기도하는데 불결한 족발환상을 보면서 들은 음성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행10:19)에 각각 등장한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p72~73 참조)
우리는 간혹 스스로 구축한 의로움의 성에 갇혀서 헤롯왕이 되거나, 자색옷을 입은 부자가 되거나, 하늘까지 높아질 바벨탑의 성주가 될 때가 많다. 예수님을 증거한 마태는 왕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완벽한 벽옥(碧玉)을 말하지 않고, 4가지 흠집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룩한 흠집에 ‘별표’를 했다. 성령잉태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의 족보를 따라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인간의 모순으로 가득한 족보가 한강물처럼 오염된 인류의 사연으로 예수님은 오셨고, 우리는 그 문명에 예속되었다. 거짓말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① 시아버지과 관계한 며느리 다말 ② 민족을 팔고서 목숨을 건진 매국노 기생 라합 ③ 재혼에 성공한 외국인 젊은 과부 룻 ④ 불륜을 극복한 밧세바 ⑤ 약혼기간에 갑자기 임신한 마리아
완벽이 무엇인가? 흠결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다. 완전하면 영원할 것인데, 수명이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인간은 본래 유통기한이 길지 못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해도, 인간은 선악과를 쳐다보면 먹고 싶은 군침이 생긴다.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심리구조다. 선악과(善惡果)는 선악지식의 나무에 있는 각종 열매로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열매들이다. 마태복음 4장에 4가지 선악과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아담에게 줬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께 내밀었던 것이 4가지가 있다. 결국, 선악과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다. ①돈(떡문제) ②능력 ③권력 ④부귀영화이다. 마지막 3번째는 권력과 부귀영화가 겹쳐서 예수님을 유혹했다.
성경을 깊게 보길 원한다. 이미 고착된 관념으로 성경을 보면, 봐야할 진실을 외면할 수 있다. 요셉이 율법으로 마리아를 봤다면,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기도함으로, 분노의 광풍을 잠재우면서, 하나님을 울부짖음으로,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헤롯왕도 요셉처럼 분노했다. 요셉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씨를 가졌으니 분노했고,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다른 왕이 태어났으니 분노했다. 헤롯왕은 제사장도 많았고 종교의 조력자도 많았으나 기도하지 않았다. 요셉은 기도했고, 헤롯은 기도하지 못했다. 헤롯이 기도했다면 요셉이 마리아를 보호하듯, 요셉가정을 보호했을 것이다. 성경은 보다 깊게 들여다봐야, 자신의 삶과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생활속에서 작은 예수를 죽이는 헤롯이 된 자신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점심시간에 본 족발환상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어졌다. 밥맛이 뚝 떨어졋고, 모든 생각에 혼란이 찾아왔다. 기존에 자신이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환상이 왔기 때문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는 족발환상을 본 그날, 작은 요셉이 된 것이다. 작은 헤롯이 된 것이다. 족발환상을 외면했다면 헤롯왕의 길을 걷는 것이고, 족발환상을 받아드리면 요셉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하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선포된다는 것, 그것은 베드로에게 감당하기 힘든 요청이었다. 나는 청량고추를 매우 싫어하는데, 청량고추 10개를 한꺼번에 먹으라고한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였으리라.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드렸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건은 율법으로 부유한 유대인과 거지 이방인으로도 확대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학설의 틀을 과감히 부수고, 진리의 성령에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사람을 사랑하고,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면서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