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8복장이 있고, 천국의 헌법전문과 같다.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하다. 8복장 중에서 3번째가 의인에 대한 것이다. 누가복음은 4복4화로 되어있고, 2번째가 굶주림과 배부름에 대한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함께 읽어보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지금 주린 너희는 복이 있나니 이는 너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라
지금 배부른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니 이는 너희가 주릴 것이기 때문이라. (누가복음)
주린 것은 굶주림이고, 목마른 것은 갈증이다. 사람은 날마다 밥을 먹어야한다. 공복의 허기는 고통이다. 채우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탐식(貪食)은 죄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할 생존의 문제다.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갈증도 마찬가지다. 술중독에 걸린 사람은 술로 갈증을 해결하는데,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담배중독, 술중독, 마약중독이 무섭다. 중독되면 끊을 수가 없다. 중독은 필수조건이 된다. 중독도 끊기 힘든데, 필수조건인 밥과 물을 끊을 수 있는가? 그냥 죽는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아야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의에 숨막히는 삶을 살았다. ‘의에 숨막히는 삶’이 무엇일까?
배고픔과 배부름의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산상수훈 말씀은 좋은 명언으로 흘러간다. 산상수훈 말씀은 구원의 정수를 알려주는 말씀의 반석이다. 8복장을 정확하게 알고서 생활속에서 실천해야만 천국시민이 될 수 있다. 산상수훈의 8복장을 듣고 깨닫는 자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담과 같다. 무엇이 천국이고, 무엇이 세상인지,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 8복장에 나타난다. 천국에서 정의하는 ‘의’가 무엇인가?
1. 굶주림과 목마름이다.
의에 굶주려야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찾는다. 식당을 찾고, 집에서 식사한다. 최소한 3번은 그렇게 한다. 맛있게 즐겁게 먹는다. 의를 그렇게 해야한다. 의가 무엇인지,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무수하게 말했다. 그러한 의를 날마다 해야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도덕률을 가지고 의로운 생활을 했다. 그것과 전혀 다르다. 바리새인은 지나친 의인의식으로 살았다. 내가 의를 이정도 행했으니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의인이 된 것이다. “내가 의인이다”라는 생각은 의에 굶주린 자가 아니다. 의로 배부른 자이다. “내가 죄인이다”는 의식이 바로 의에 굶주린 자이고, 의에 목마른 자이다. 또한 십자가로서 죄가 모두 사해졌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를 행해야한다.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 배가 고프듯, 갈증이 나듯, 그렇게 행해야한다. 기도하는 것도 ‘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함으로’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다.
2. 굶주림과 배부름의 관계
의에 굶주린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했다. 배부름을 주시는 분은 곧 하나님이다. 사람은 의에 굶주린다. 굶주림을 계속 느끼고 갈증을 계속 느낀다. 허기가 채워지지 않듯이, 목마름이 마르지 않듯이 그렇게 의를 행한다. 의를 행해도, 행해도, 의롭지 못하다. 그런데, 어떻게 의로서 배부름을 받을 수 있을까? 배부름을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확인증’이다. 하나님께서 “너가 의롭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의로운 배부름’이다. 선지자들과 순교자들은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갔던 것이다. 삶속에서 이 말씀을 깊게 새겨야한다.
나는 의인인가? 스스로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 의인이 된다. 사람을 날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헌신과 겸손으로 성령과 함께 경건에 이르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 돈이 있든 없든, 힘이 있든 없든, 소유가 넉넉하든 가난하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간절히 염원해야한다. 의에 굶주리고 의에 목마른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의에 굶주린 성도를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한다. 사람들이 “너는 의인이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의인으로 추앙받는 너는 죄인이다”고 하면, 추락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 되어야한다.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를 행해야한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했을 때, 성도가 행할 ‘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행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행하면, 하나님은 배부름으로 그 사람을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마태복음 13:44~46에 밭에 감추인 보화, 값비싼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가 나온다. 첫째 비유는 밭속에 보화가 묻힌 것이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하셨다. 그런데, 2번재 비유는 천국을 ‘진주’에 비유하지 않고,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하셨다. 비싼 진주를 찾으러 다니는 상인이 곧 천국이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하면, 그때 하나님은 생각을 달리 하신다. 그래서 오늘도 의에 굶주리고, 의에 헐벗고, 의에 목마르면서 의를 행해야한다. 예수님은 의에 숨막힐 정도로 의를 행하셨다. 단 한순간도 ‘의’를 멀리하지 않으셨다. 미세먼지가 가득찬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의’를 날마다, 매순간 행하시면서 살으셨다. “내가 의를 행하고 있나?”라고 수시로 물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나?”라고 수시로 점검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아름답다. 배꼽시계는 어김없이 배고픔을 말해준다. 그처럼 양심과 영혼과 성령은 인생에게 ‘행해야할 의’를 알려준다. 그때 그것을 해야한다. 그것을 해야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요단강물에 들어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행위를 하시니,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의로운 말씀이 내려왔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이다’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