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인생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기도하지 않는다. 옛날 교회에 다녔을 때는 성공만을 위해 기도했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을 간구했다. 그러나, 성경을 깊게 배우고, 설교말씀을 진실로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전쟁에서 지는 것이 때론 장엄한 승리일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마치 십자가처럼.
그렇다고 인생에서 ‘무조건 패배가 십자가 승리’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태만하게 행하거나 미련하게 대처함으로 패배를 했으면서, 십자가로 포장할 수도 없다. 겟세마네 동산의 간절한 기도처럼, 하나님께 뜻을 묻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서 인생의 한계를 향해 나아가는 자마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여리고성 사건처럼!! 또한 아이성처럼!!
아이성의 참패와 앗수르 침공과 바벨론 침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례미아는 공개적으로 “바벨론에 항복해야 살 수 있다”라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백성과 지도부에 ‘국가적 항복’을 촉구했다. 선지자의 간절한 절규였다.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가 “감히 하나님의 군대가 패하다니, 전면전이다”라고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몰살당할 확률이 높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돌아보고, 군사력이 얼마나 미약한지 스스로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더니, 아간의 범죄를 알게 하셨다. 정보가 있으니,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아간의 숙소를 ‘압수수색’하니, 증거물이 나왔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범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미운 물건이 있는데 잘되면, 그 사람과 단체와 국가는 계속 미운 물건을 드라빔처럼 품을 것이다. 아이성의 참패는 곧 지도부의 타락상이다.
“외부의 말을 듣는 것은 사탄의 총을 맞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백성의 귀를 막는 지도부는 하나님의 재앙을 면책받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했던 자는 바로 ‘랍사게’였다. 랍사게는 산헤립의 대변인이다. (이사야 36장)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길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너희는 히스기야에게 현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앗수르가 침공했을 때,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20만 대군으로 포위했다. 권력과 압제와 교리와 통제로 성도를 포위하고, 자유를 박탈하고서, 눈과 귀를 틀어막고, 볼 것을 못 보게 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게 하면서 ‘히스기야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는 지도부마다 ‘랍사게’에 해당한다. 랍사게는 자신이 믿는 왕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외친다. 교주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본이다. 기도하는 자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해서 모든 사건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아도 그러했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이 침공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았고, 산헤립이 침공했을 때는 히스기야가 베옷을 입고 낮아져서 하나님을 울부짖었다. 이사야도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멸망을 걱정하면서 지도부가 낮아져서 새롭게 개혁했다. 이러한 정신이 없다면, 하나님은 언제든 앗수르와 바벨론과 로마의 도끼를 들어서 심판을 감행하신다. 개인과 단체와 국가는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겸허히 낮아져야한다.
언론의 보도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막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하나님께서 감행하시는 일들은 사람이 알 수가 없다. 야곱이 위대한 이유는 에서만을 편애한 아버지 이삭에 대해, 폭력으로 위협한 형 에서에 대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급여를 항상 속였던 회사 사장 라반에 대해 ‘하나님이 세운 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다. 모든 인생앞에 얍복강 나루터 씨름 사건이 놓여있다.
기독교복음 선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동일하게 하나의 씨름이 일어난다. 왜 그럴까? 그것 때문이다. 그것을 고치라는 것인데,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그 단체의 멸망은 무엇에 비할꼬….. 그곳 출신인 나로서 매우 슬픈 일이다. 내가 더 애닯은 것은 그곳의 성도들이 ‘실화 탐사대 25회’를 안본다는 것이다. 실화 탐사대가 월명동 내부로 들어가서 밀착취재한 것은 ‘언론의 도끼’가 나무에 이미 놓였음을 계시한다. (마3:10)
[언론의 바벨론과 실화탐사대 25회]http://www.ebsnews.co.kr/?p=19188
실화 탐사대 25회가 하나님의 행하심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서 “뱀새끼들아, 너희들이 진노를 피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도끼가 나무에 이미 놓였다”(마3:7)고 심판을 경고했다. 그 심판의 경고가 그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이것을 듣지 못한 성도들은 지도부의 책임이며, 또한 성도의 책임이다. 듣지 못하게 해서 듣지 못했다고 변명해도 그것은 이유가 아니다.
아담이 말하길, “줘서 먹었다”고 했으나, 그것이 면책되지 못했다. 본인이 스스로 분별해서 행할 뿐이다. 지도자를 탓할 것도 없다. 북한에 있는 자들은 목숨을 걸고서 그곳을 나온다. 반면 종교의 북한을 탈출하는 자들은 구원의 목숨을 걸고서 그곳을 나와야한다. 편견의 북한을 탈출하는 것도 동일하다. 늘 동일한 사고에 갇혀서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억울함을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모든 것은 나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