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수학문제를 풀 때, 항상 공식과 기본문제를 배우고, 응용문제를 풀었다. 성경의 공식은 무엇이고, 기본문제는 무엇이고, 응용문제는 무엇일까? 성경의 기본공식은 창세기 1장 2장 3장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창세기의 응용문제이다.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은 창세기 사건이 주는 ‘비유와 교훈’을 깊게 새겨야한다.
인생을 살아보니, 항상 갈림길에서 갈등했다. 내가 가지 않았던 다른 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내가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내가 다른 종교를 택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내가 다른 대학을 선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내가 다른 배우자와 결혼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인생은 누구나 갈림길에 서있다. 어떤 갈림길은 생명길과 사망길을 예고한다. 그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창세기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창세기 2장 9절에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고 했다. 에덴동산에는 중요한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하나는 생명나무, 다른 하나는 선악나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알려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항상 알려주시고, 생명길을 가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에덴동산에 계속 살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창세기 사건은 모든 인생가운데 재현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가나안에 정착했으나 가뭄이 들었다. 그래서 점점점 이집트로 주소지를 옮겼다. 고대사회는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뺏는 약탈문화가 있어서,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갈 생존전략으로, 아내를 이복누이로 대하며 남매처럼 살았다. 바로왕이 사라를 궁녀로 삼고 취하려다가 재앙이 발생하자, 뒤늦게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준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여자 하갈이 사라의 몸종이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사랑해도 되는 여자 사라, 다른 하나는 사랑해서는 안되는 여자 하갈이다. 사라는 생명나무요, 하갈은 선악나무였다. 고대사회는 부족사회였고, 후계자는 매우 중요했다. 85세에 아브라함은 318명의 특공대를 데리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가업을 이뤘다.
사라는 후사를 잇기 위해 입양제도를 생각했고, 몸종 하갈을 씨받이로 추천했으나, 하갈이 임신하자 상속권을 주장했다. 인생앞에 먹어서는 안되는 선악나무를 먹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듯, 그러한 재앙이 발생한다.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 가정은 그때부터 가정불화가 시작됐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나중에 추방당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얻었다. 이삭의 아내가 리브가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다. 형이 에서, 동생이 야곱이다. 창세기 25장 28절에 보면,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그를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주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의 특기’를 어려서 발견해 전문 사냥꾼으로 키웠다. 그런데, 에서는 신앙을 갖지 못했다. 반면, 야곱은 장막에 거주하면서 부모를 통해 신앙을 교육받았다. 에서처럼 세상적으로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익숙한 사냥꾼’이 될 정도로 에서는 실력이 매우 좋았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할 때 자기 취향대로 길러서는 안된다. 자녀는 하나님께 맡기고 신앙의 숨결을 넣어줘야한다. 들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들에서 세상 것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야곱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들판에서 잠이 든 야곱은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다리를 보았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의 차이점이다.
이삭이 죽을 때가 되었다. 이때 이삭에게 운명처럼 창세기 3장 시험문제가 놓였다. 후계자를 정하는 축복기도 문제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맏아들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작정했다. 이삭은 야곱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삭은 에서만 몰래 불러서 ‘별미’를 해오면, 마지막 축복기도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것을 리브가가 엿듣고, 야곱을 에서로 분장해서 대신 축복받는 사건이 나온다.
아담앞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었는데, 아내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고 바가지를 긁으니, 아담이 그렇게 했다. 아담의 가족동산에서 발생한 비극이다. 아브라함의 가족동산에서도 두 여자가 있었는데, 아내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줘서, 아브라함이 그것을 취했다. 그리고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그런데, 이삭의 가족동산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이삭이 신앙을 상실한 에서에게 모든 유산과 가업과 장자권과 축복권까지 몽땅 넘겨주려고 하자, 리브가가 그것을 막았다.
이삭이 선악과를 따먹으려 하자, 리브가가 그것을 막은 것이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바꿔치기 하면서 그것을 막았다. 이삭의 후계자로 두 나무가 있었으니, 쌍둥이 나무였다. 하나는 형 에서의 선악나무요, 다른 하나는 동생 야곱의 생명나무다. 에서가 가져온 식사는 선악나무의 식사였고, 야곱이 가져온 식사는 생명나무의 식사였다. 리브가의 지혜로 남편 이삭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화위복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예수님께도 두 길이 놓였다. 하나는 생명의 길,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생명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사망길은 권력의 길이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윗왕권을 계승한 그리스도로 믿었고, 4.19 혁명처럼 민심을 이용해 군사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믿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것을 입증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 7:29)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눅 9:20)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권력의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했다. 이것이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의 시험문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그것이 생명나무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그것이 선악나무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했다. 여기서 재물은 ‘돈’이 아니고, ‘맘몬’의 재물신이다.
창세기 에덴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듯, 인생의 동산 중앙에 언제나 하나님과 세상이 놓여있다. 무엇을 중심해서 살 것인지, 그것은 인생의 자유의지다. 생명나무인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면 생명의 길이 열리고, 선악나무인 세상의 것을 중심해서 살면 사망의 길이 열린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문이요, 선악나무는 사망의 문이다. 문을 열기전에 반드시 신중하게 결정해야한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명나무의 길을 가야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아름다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도망쳤지만, 나중에 참회하고 생명나무의 길을 걸어갔다. 사람이 보기엔 죽음의 길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생명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생명나무의 길’이고, 선악나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망나무의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성경은 십자가의 길을 생명나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이 보기엔 어리석은 선악나무의 길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생명나무의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