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다. 빛-하늘-땅과 바다, 해달별-새와 물고기-짐승과 사람의 순서로 창조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축복하고, 7일째는 안식일을 축복하고 그때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창세기 2장에는 천지창조가 반복되면서 약간 방향이 다르다.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곳에 거주할 사람에게 생기를 넣고 관리하게 하시고, 먹을 것도 특별하게 챙겨주시며, ‘선악과 금지령’을 내리신다. 돕는 배필까지 하나님이 중매를 서신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완벽 그 자체다. 인생가운데 창세기 1장과 2장만 있으면 좋겠건만 ‘창세기 3장’은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창세기1:1) 그 창조는 과거완료인가? 현재완료 및 미래형인가? 이것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나뉜다. 창세기 2장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한 것 같다.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로 넘어서면서 ‘목축과 농경’을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에는 밭농사를 시작했다. 청동기 시대에 논농사 및 가축을 기르고, 종교가 시작됐다. 잉여 농산물이 생기면서 관리하기 위해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울타리를 지키는 관리자를 두었다. 에덴동산은 곧 문명의 동산이다.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언론사를 경영한다. 출판동산과 언론동산인데, 내가 살아갈 수익이 이곳에서 발생한다. 내가 만들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에덴동산으로 각종 동물을 불러와서, 아담이 그 동물을 어떻게 부르는지, 부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사업이 잘되도록 사람을 연결해주시고, 되는 여건을 엮으시는 분도 결국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보기에 자신이 이름을 부르니, 자신이 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사업을 확장하니 자기가 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주셔서 얻은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환경까지도 창조사역에 포함됨을 말씀하신다. 돕는 배필까지도 하나님이 행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볼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와 만나서 결혼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업과 사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되어지는 창조사역의 연장선이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세상과 종교로 구분된다. 창세기 1장만 있었다면, 창조주는 창조하시고 그대로 관망하시는 관찰자 시점에 놓인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직접 배우가 될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어서 다른 배역을 쓸 수도 있다. 창조주는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과 함께 이 땅에서 사는 방법을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2장의 깊은 비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창세기 2:7은 창세기 1:2의 축소판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더불어, 마태복음 3장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장면과 연결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4:1)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하냐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관점(觀點),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인생은 간절히 기도하고, 마음을 비우고, 성경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광풍이 밀려올 때도 침묵속에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 눈물로 울어야한다.
마태복음 3:17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음성은 세례요한도 듣지 못하였다. 오직 예수님만 들었다. (요한복음 1:33-34 참조) 세례요한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이처럼 쉽지 않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으니, 그 성령의 비둘기를 새장에 가두듯 잡는다면 잡힐까? 그렇지 않다. 성령의 비둘기가 날아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래서 항상 ‘성령에 이끌려’ 살아야한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서 예수님을 붙드셨다. 인생도 성령에 붙들려서 살아야한다. 성령은 비둘기로 비유했을 뿐, 사람이 ‘성령의 능력’속에 갇혀서 살아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의 관점을 얻는 방법이다.
“교주의 말씀대로” 했을 뿐이다. 이런 말도 무익하다. 예수님조차 예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을 지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반대했다. 그 명분이 얼마나 거룩한 ‘절대충성의 표본’인가?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지적했다. 무엇이 생명나무이고, 무엇이 선악나무인지 분별해야한다. 분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면, 그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쁜 길일 수도 있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판단하는 것이다.
돕는 배필은 분명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돕는 배필이 나쁜 배필이 되었다. 선한 배필이 악한 배필이 된 것이다. 하와도, 아담도, 결국 선악나무였으나, 악한 나무로 전락했다. 모든 인생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악나무이고, ‘악’을 멸하면서 ‘선’을 지향하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과도기를 살아야한다. 생명나무는 선악나무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방향이 된다.
제자가 배신할 때가 있다. 그때 어찌 해야하는가? 예수님께 베드로가 그러했다.
스승이 배신할 때가 있다. 그때 어찌 해야하는가? 사무엘에게 엘리 스승이 그러했다.
믿었던 왕이 배신할 때가 있다. 그때 어찌 해야하는가?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왕들이 그러했고, 특히 사무엘에게 사울이 그러했다.
믿었던 전임자가 배신할 때가 있다. 그때 어찌 해야하는가? 다윗에게 사울이 그러했다.
믿었던 교회가 배신할 때가 있다. 예수님께 유대교가 그러했다. 아내가 배신할 때가 있다. 아담에게 하와가 그러했고, 삼손에게 드릴라가 그러했고 호세아에게 고멜이 그러했다. 남편이 배신할 때가 있다. 리브가에게 이삭이 그러했다. 믿었던 나라가 배신할 때가 있다. 백성들에게 아합왕이 그러했다. 백성들에게 헤롯왕이 그러했다…… 돕는 배필은 에덴동산처럼 하나님이 주셨다. 돕는 배필이 배신할 수 있다. 배신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자신을 방해한 것은 작은 일이요, 하나님을 방해한 것은 크고 치명적 문제다.
하와는 남편에게 선악과를 줬을 뿐이다. 그 사건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에 해당한다. 다윗은 밧세바와 달콤한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했다. 남의 여자를 탐했고, 그 남편까지 권력으로 살인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했다. 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바로 ‘선악나무의 길’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선악과를 먹는 길이요, 영혼의 사망길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람’
하나님은 분명 2번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서 1번, 창세기 2장에서 1번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세상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르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각각 분리되어 살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어둠에서 빛이 나뉘고, 하늘을 통해 궁창위 물과 아래 물이 나뉘고, 뭍과 물이 나뉘고, 남자와 여자를 나눈다. 해달별을 구분하고,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구분한다. 그처럼,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은 다르다. 노아 홍수심판이 일어났던 배경설명에 자세히 나와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을 좋아하는 대로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창6:1~2)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구분하셨을까? 창조사역의 과정이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흑암과 혼돈속에서 빛을 축출하셨다. 어둠속에서 빛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빛과 어둠을 분리하고, 빛을 낮으로 어둠을 밤으로 불렀다. 물을 허공으로 나누고서 궁창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 뭍과 물을 구분해서 땅과 바다로 불렀다. 물속에서 물고기를 분리하고, 허공에서 새를 분리하고, 땅에서 짐승을 분리하고, 짐승에서 사람을 분리했다. 이제 사람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했다. 만물속에 ‘사람’도 포함되니, 사람은 세상을 정복하면서 ‘사람’도 정복하는 계급사회가 발생한다. 이것이 세상권력의 짐승세계다.
짐승들은 짐승끼리 잡아먹는다. 그처럼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구조,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는 계급구조가 바로 창세기 1장의 세상이다. 이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1차 창조의 마침이고, 2차 창조가 진행된다. 2차 창조는 사람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창조사역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다. 세상사람속에서 분리된 사람이 곧 아담이며, 분리된 공간이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은 교회이며, 아담은 성도를 말한다.
창세기 1장에는 금지조항이 없다. 반면, 창세기 2장은 ‘금지령’이 선포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단서가 붙는다. 고조선의 8조금법과 같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이다. 반면,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면 안된다. 상식이다. 그것을 행하면 짐승의 인(印)을 맞은 자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안되듯, 사람이 사람을 종처럼 부려서도 안되고,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해서도 안되고, 훔쳐서도 안된다. 살인은 더더욱 안된다. 선악과 금지령은 그러한 법령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주인은 ‘사람’이다. 반면, 창세기 2장에서 주인은 하나님이다. 에덴동산은 아담이 ‘관리자’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즉, 하나님이 왕으로 군림하신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완벽한 차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군림하시지만, ‘왕’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세상 왕과 전혀 다른 ‘사랑과 평화의 남편’으로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만사가 편하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해서도 안된다. 대신하면, 그 대리자는 우상이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비밀이다. 에덴동산의 소유권은 하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