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월 8일, 마가복음 8장을 읽었다. 내 인생의 광야에는 날마다 성경의 만나가 1장씩 내려온다. 마가복음 8장은 ▲7병2어 ▲헤롯의 누룩 ▲벳새다 맹인 ▲베드로 고백 ▲베드로 반대 ▲십자가 의미가 나온다.
◆ 칠병이어(七餠二魚)의 표적
칠병이어의 표적, 오병이어 표적은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이단들은 이 사건을 “말씀의 표적”으로 풀이하면서, 그 의미를 상쇄한다. 기독교도 문제이고, 이단들은 더욱 문제다. 기독교는 ‘떡’에 방점을 두면서 의미를 왜곡했고, 이단들도 ‘떡’에 방점을 두면서 그 의미를 잃었다. 방점은 ‘떡의 나눔’과 ‘떡의 거둠’에 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표적은 공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본질이 상실되면 안된다.
4천명이 광야에 있었다. 100명씩 40개 무리로 나누었고, 12명의 사도들과 여자 사도들도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한 것과 같다.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었다. 그것을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제물을 떼어서 백성들에게 나눈 것이다. 보통 제물은 백성이 먹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작은 제물이지만 백성들과 나누는 새로운 제사법을 보이셨다. 엄청난 종교혁명이 떡 7개로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사건을 잘못 풀어서 ‘떡 7개가 4천개가 되었다’라고 풀이한다. ‘떼고, 떼고, 떼고’라고 설명한다. 뻔히 보이는 허풍에 누가 속겠는가? 떼면, 떡은 줄어든다.
성만찬을 생각해보라. 그 누가 배부르게 포도주를 시음하고, 떡을 먹는가? 분병(分餠)과 분잔(分盞)을 할 때, 작은 떡과 작은 포도주를 마실 뿐이다. 칠병이어를 그렇게 한 것이다. 아주 작게 나눈 다음에, 그것에 상징적 의미를 더하고, 말씀을 전하시며 성찬식을 하신 것이다. 산상수훈 8복장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게 했을 수도 있고, 각자 설교권을 맡겼을 수도 있다. 여자 사도들까지 해서 지도자들이 40명이 되었다면,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바로 100명씩 각자의 교회를 맡아서 설교가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이 끝나고 해산을 시켰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떡 광주리 7개가 남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이 떡을 나눠주니, 백성들도 떡을 나눠준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공동체의 미덕인가? 예수님은 백성을 생각하고, 백성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이런 공동체가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은 떡 7개를 작은 씨앗으로 쪼개서 겨자씨를 4천명에게 심었더니, 7광주리로 결실이 이뤄졌다. 이것을 제자들이 직접 체험한 것이다. 떡 7개가 광주리 7개로 변했으니, 이것이 말씀의 창조력이다. 오병이어에서는 떡 5개로 5천명에게 나누고, 광주리 12개를 거뒀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영적 신령한 양식을 보이셨고, 나눔의 행실을 실체로 입증하셨다. 그때 광주리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제자들이 보았으니, ‘일곱 광주리’라고 기록한 것이다.
일곱 광주리를 ‘일곱 제자’로 풀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때는 남자 12사도를 비롯해서 여자 사도들과 70문도까지 조직된 시점이니, 지도자들이 상당히 모였을 것이다. 5천명 대집회, 4천명 대집회를 2번 크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7명만 모였다니 말이 되는가? 비유의 맥락으로 풀이하면, 일곱 광주리는 일곱 새로운 공동체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광주리는 공동체의 결속이 담겨서 그렇다.
마가복음 8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찰할 사건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밧새다 소경의 기적 ▲베드로의 고백과 반대 사건이다. 3개 장면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4천명이 모였을 때, 제자들은 “결속”을 원했으나, 예수님은 “흩어짐”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뜬금없는 소리같지만, 4천명 집회를 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곧 민족주의자들로 무력항쟁 독립투사들이다. 촛불집회를 열었을 때 중심축은 진보정치집단이었다. 그처럼 4천명이 예수님을 순수하게 따른 것이 아니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특정 집단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극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비유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실체를 비유와 혼합해서 쉽게 표현한 것인데, 제자들은 ‘누룩’만 들리고,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인식관이 무섭다. 한번 인식이 틀어지면, 실체가 가려진다. 예수님이 사명자를 보내는 것은 사명자속에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인데, 무지한 사람들은 ‘사명자’만 본다. 사명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봐야한다.
사명자는 ‘상징과 비유’일 뿐이다. 그가 누구이든, 사명자는 ‘상징과 비유’에 속한다. 실체는 비유속에 있거나, 비유 옆에 위치한다. 비유와 상징으로 사용되는 사명자가 변질되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되는 것이다. 이단의 교주들이 곧 ‘변질된 누룩’이다. 본래는 먹을 수 있는 빵이었으나, 자신들을 신격화하면서 점점점 변질되면서 ‘누룩’이 된 것이다. 이들을 극히 조심해야한다.
벳새다 맹인은 베드로와 고향이 같다. 베드로의 고백 사건 바로 앞에 벳새다 맹인 사건을 배치한 것은 ‘베드로 사건’을 복선으로 암시한 것이다. 마가의 편집 전략이다. 벳새다 맹인이 베드로는 아니다. 그러나, 벳새다 맹인 사건이 베드로를 비유적으로 암시한다. 마가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된 것이다. 벳새다 맹인은 2번 눈을 뜬다. 1번째 눈을 떴을 때는 ‘사람’이 보였고, 2번째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밝히 보였다.
베드로도 동일했다. 예수님이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베드로가 말하길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한 그리스도는 ‘정치적 그리스도’를 말한다. 벳새다 맹인처럼 ‘사람’이 보인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반대했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질책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권력의 누룩을 먹으면, 십자가를 ‘죽음’으로 본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십자가는 생명으로 보인다.
지금, 무엇이 보이는가?
나에게 주님은 누구인가?
주님은 2가지를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