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심판의 반대는 가뭄심판이다. 홍수는 물이 넘치는 것, 가뭄은 물이 현저히 부족한 것이다. 풍년과 흉년이 홍수와 가뭄이다. 경제적 빈곤도 심판이고 경제적 풍요도 심판이다. 전자의 심판은 실감적으로 깨닫는데, 후자의 심판은 무감각해서 깨닫지 못한다. 후자가 더 무섭다. 율법이 풍요로워 선민사상에 갇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팔아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인생을 살면서, 나는 여전히 어둔 밤길을 걷는 듯, 갇혀있다. 낙담할 수밖에 없는 절벽을 걷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마음을 붙잡고 쓸쓸히 불러본다. 나는 밤이다. 꿈도 없는, 악몽같은 깊고 깊은 밤이다. 삶은 해석되지 않은 꿈과 같고, 풀리지 않는 인생길은 악몽같다.
[창세기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으로,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신 다음에, ‘밤’이 먼저 시작되었다. ‘불렀다’는 것은 ‘호명’도 되고, ‘왔다’로서 ‘시작하다’의 의미도 가능하다.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모르겠으나, 빛을 먼저 불렀고, 밤을 2번째로 불렀으나, 밤이 먼저 왔고, 다음은 아침이 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다. 저녁과 아침 그 사이에 밤이 있다. 인생은 모두 꿈을 갈망하는 밤길이다.
나는 가끔, 인생은 살아있는 동안 ‘탯줄’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선분이며,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밤’에서 출발해서 ‘밤’으로 종결된다. 출발지는 항상 모태(母胎)이며, 종착지는 항상 무덤이다. 모든 인생이 동일하다. 남는 것은 이름과 업적과 후손이다. 종교적으로 그 영혼이 남아서 죽음의 강을 건너간다. 죽음의 강과 관련해 드라마 도깨비(공유, 김고은)을 통해 상세히 연출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덜 먹은 듯 먹어라”고 하셨다. “더 먹고 싶거든 숟갈을 놓아라”고 하셨다. “배고플 정도로 먹어라”고 하셨다. “배가 터지게 먹지 말라”고 교육했다. 모두 같은 말씀이다. 밥상머리 교육은 내 사상의 뼈대가 되었다. 나는 항상 밥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의 교훈을 기억한다.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나는 자주 참는다. 그렇지 못할 때도 많지만, 나는 자주 ‘덜 먹는 방향’을 채택한다. 그것이 내게 유익했다.
창세기는 1장~5장까지 아담이 주인공이고, 6장~10장까지 노아가 주인공이다. 총 50장으로 구성된 창세기에서 초반부는 아담과 노아로 구성되고, 정확히 절반으로 나뉜다. 하나님을 믿는 특출난 인물이 나타날 경우, 그때는 ‘빛’이 비추니, ‘아침’이 시작한다. 그전은 깊은 밤이다. 밤도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다. 낮도 밤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우리는 간혹 성경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너무 조명하면서 그 주변과 배경을 무시할 때가 많다. 성도는 대부분 주변에 속하고, 배경의 어느 소품이거나, 그늘 구석진 곳에 위치할 때가 많다. 나무 사이에 놓인 돌밑에 숨어있는 아담의 모습이 자신일 때가 많다. 주변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창7:12)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 (창7:17)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다. (창7:18)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다. (창7:19)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다. (창8:1)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다. (창8:13)
물심판은 물이 넘치는 것이고, 불심판은 불로 화재가 일어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이다. 자연현상이 신의 재앙일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산폭발과 대지진으로 도시가 지하로 매몰됐다고 성경학자들이 증언한다. 자연재해이지만, 신의 심판이다.
풍요로운 것은 ‘무료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위험이 높다. ‘잘된다 잘된다 잘된다’는 칭찬이 자녀를 ‘응석받이’로 만들어서 독립심이 상실된 마마보이로 만들 위험이 높다. 넘침이 축복은 아니다. 배가 계속 부르는 것은 저주다. 배가 불렀다가 다시 고팠다가 반복되어야한다. 계속 ‘낮’이 지속되면 북극이다. 밤과 낮은 계속 반복되어야 아침을 날마다 새롭게 맞는다. 계속 잘될 때는 ‘적신호’가 다가온다는 결정적 증거다. 신호등도 파란불과 빨간불이 반복된다.
바로왕이 꾼 꿈도 풍년과 흉년이 겹쳐서 진행된다. 인생은 풍년과 흉년이 함께 있어야 신의 축복이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다가, 노예로 팔렸다가 감옥에 갇히면서, 특권의식이 섬김의식으로 점점점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낮아짐이 없다면 높아짐도 없다. 갇힘이 없다면 자유도 무익하다. 홍수심판도 물의 넘침을 ‘돈의 넘침’과 ‘자유의 넘침’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한다.
언젠가 초콜릿 분야 회장이 내게 말했다. 그녀는 “지난해,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데, 가만히 있어도 돈이 쌓이는데, 그때 무감각과 무료함이 나를 망쳤다”고 회상했다. 그녀에게 그때가 풍년 7년이었다. 잘될 때는 안될 때는 대비하는 것이다. 잘되던 그때 초콜릿 여인은 대비를 잘했을까? 그때 이후 만나지 못해서 소식은 모르겠다.
여성협회 어떤 회장이 나와 친분이 두터웠다. 영락교회 권사였던 그녀는 말년에 선릉역 근처에 ‘몽** 빌딩’을 건축하면서, 쓸쓸히 인생을 보냈다. 그때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건물을 지으면, 엄청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고, 현금은 만지지도 못하고, 건물이 감옥이야. 이것을 어찌 해야할지, 내 인생의 실패작이야”라고 말했다. 빚내서 건물을 짓다보니, 빚갚는데 인생의 말년을 보냈고, 건물을 짓고, 건물 지키려고, 건물에 갇혀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생전에 내게 말하길, “부자는 현금이 없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돈이 넘치면 더 잘 쓸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탐욕이 더 넓어지니, 그들에게 풍부한 돈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또한 사업을 관리하는데 돈이 더 들어간다. 그것이 돈의 물심판이다.
믿는 성도와 교회는 세상문명을 수면으로 떠올라야한다. 창세기 7:17을 기억해야한다. 물이 많아지니, 방주가 떠올랐다. 물속에 갇히지 않았다. 물이 더 많아지니, 방주는 물위로 떠서 다녔다. 세상위로 떠올라야한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한다. 이것은 창세기 1:2과 직접 연결된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엘리야는 가뭄을 선포하고, 바알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을 떠나, 그릿 시냇가에서 인심 좋은 까마귀들과 함께 지냈다. 엘리야는 우상의 소굴인 시돈성에 직접 들어가서, 사르밧 과부 집에서 숙식했다. 우상의 소굴에서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 집에서 노예로 살았지만, 모든 살림을 다스리고 주관하며 살았다. 보디발 장군의 사모가 옷을 벗기자, 보디발 장군을 통해 요셉은 그 집 감옥에 구분되어서 살았다. 감옥에 갇힘으로 보디발 아내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넘쳐날 때, 그 위로 떠올라서 속하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홍수심판을 피하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