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엉뚱한 결론에 다다르고, 번역의 오류를 맹신하면 정반대 사실에 봉착한다. 그래서, 한국번역과 원문내용을 점검하는 것이 성경읽기의 필수조건이다. ‘틀릴 수 있다’는 불완전을 인정할 수 있어야한다. 2019.4.9. 조선일보A23면에 나온 ‘키라 나이틀리’ 기사처럼, “나는 완벽한 얼굴엔 별 흥미를 못 느낀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할 수 없으니까”(키라 나이틀리의 말) 불완전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겸허함을 가져야한다. ‘불완전의 진실성’은 성경적 용어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더라’(창2:25)와 같다.
홍수심판이 모두 끝나고, 노아는 포도원을 경작하고, 포도주를 만들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노아는 함과 야벳과 셈의 3아들이 있었다. 함의 넷째 아들이 가나안인데, 손자가 할아버지의 발가벗은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아버지 함에게 말하자, 함이 아버지의 모습을 본 다음에 두 형제에게 말했더니, 두 형제가 자신의 가죽옷을 가지고 뒷걸음쳐서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가린 사건이다.
이후,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서, 그것을 놓고서 축복과 저주를 했다.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은 함이 행한 일을 말한다. 함은 저주를 받았고, 셈은 축복을 받았다. 셈은 무엇을 잘했을까?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문을 해석할 경우, 셈의 가죽옷을 가져다가 야벳과 함께 들고서 노아의 하체를 덮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 일어나니, ‘셈의 가죽옷’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함이 노아를 비난한 것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노아의 술주정도 아니고, 포도주에 만취해서 발가벗고 추태를 부린 것도 아니다. 왜냐면, 노아의 장막에서 포도주를 마신 것이고, 그것을 몰래 훔쳐본 것은 가나안과 함이다. 가나안과 함이 잘못한 것이지, 노아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신 노아를 통해서, 우리의 관점으로 노아를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 용어로 그 사건을 보면,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성경적 상상력이다.
노아가 지금 현재 살아있을 수도 없고,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노아의 행적으로 추적할 수밖에 없지만, 성경 텍스트는 ‘노아의 벌거벗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노아의 벌거벗음이 함이 볼 때는 부끄러웠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벗은 모습을 안 봤다. 그것은 노아의 행위를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 텍스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었다’라고 되어있다. 텍스트를 넘어선 다른 상상은 하면 안된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것이다. 다윗이 법궤를 다윗성에 가지고 들어왔을 때,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니, 미갈이 업신여기며 비웃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은 기쁜 것이고, 미갈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놓고서, 가나안과 함의 생각이 달랐고, 셈과 야벳의 생각이 달랐다. 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한 것은 셈과 야벳이고,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한 것은 가나안과 함이다. 성직자의 결함을 덮어야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깊게 생각할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다. 보기에 민망한 사건일지라도, 신앙적 표현은 각자 자유로운 것이다. 노아가 자신의 장막에서 행한 일인데, 함과 가나안이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옷이 벗겨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노아는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드러낸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대하고, 부끄러워한 가룟유다이며, 유대인들을 말한다. 반면, 셈과 야벳은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 등등 제자 공동체를 뜻한다. 믿는 성도가 세상앞에 벌거벗겨지듯 연약해도, 하나님께 진실하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약함도 죄가 아니다.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믿음의 부족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발가벗겨진 그때, 실상 노아의 가족은 발가벗겨졌다.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홍수심판이 쓸고간 마을을 복구하고, 재건한 주민은 오직 노아 가족이다. 참상을 날마다 목도하면서, 그많은 시체들을 어찌 치웠을 것인가? 슬픔을 씻고, 씻고,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그들의 아픈 고통이리라. 노아도 슬펐으나, 신앙적으로 버텼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포도주에 취해서,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다면….. 셈이 가져간 가죽옷은 노아의 장막과 같고, 노아의 방주와 같다. 세상이 볼 때, 우리가 갇혔거나, 발가벗겨졌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노아처럼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에 취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요셉처럼 감옥도 ‘좁은 궁궐’로 감사할 수 있다. 정녕, 노아가 포도주를 흠뻑 마시고, 그의 장막에서 찬양을 했던 것은 비록 마을 주민들이 모두 죽고, 폐허가 된 슬픈 장소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서, 슬픔속에서 기쁨을 노래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심판은 모든 것을 멸하는 심판이고, 아브라함의 심판은 떠남의 심판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분리의 심판’이 이미 진행됐다. 갈대아 우르는 그대로 살아가고,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면서, 과거는 심판받은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개념은 요한복음에 자세히 나와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홍수심판만 생각한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떠남의 심판’이다. 하나님이 떠나면, 그것이 심판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니, 사울은 악령의 지배를 받았다. 하나님이 떠나는 것이 곧 심판임을 알아야한다.
요셉의 신학은 ‘갇힘과 풀림’이다. 요셉은 갇히면서 하나님을 더욱 애절히 찾게 되었다. 형제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갇혔을 때, 이집트-보디발 장군 집- 감옥으로 점점 영역이 축소되었다. 노예에서 죄수로 자유는 속박되었다. 총리대신이 되기전, 28세에 요셉은 가장 절망적이었다. 술관장의 꿈을 해석해줬지만, 그가 요셉을 잊었다.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고,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접한 술관장의 사건을 기억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악몽을 보냈다. 바로는 꿈에 갇혔다.
바로가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니, 요셉도 바로를 악몽에서 꺼내줬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갇혔던 요셉에게 바로를 풀어줄 열쇠가 있었다. 감옥에 있는 요셉에게 ‘왕의 열쇠’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흉몽도 길몽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요셉의 신학이다. 요셉은 노예의 삶도, 축복의 삶으로 인식하며 충성스럽게 살아냈다. 감옥에서도 술관장과 떡관장을 섬기면서 궁궐처럼 살아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요셉의 신학으로 살면, 갇히고 묶인 것들이 풀어진다. 요셉은 바로왕의 흉몽을 풀었고, 야곱가정의 형제불화를 풀어냈고, 이집트에 닥칠 7년 대흉년을 7년전부터 미리 준비해서 경제문제를 풀어냈다. 정책은 7년후를 내다보고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한민국은 5년 단임제여서, 정책을 시행하면 다음 정권에서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2년 단임제로 바꿔야 대통령의 정책이 연속성이 있어서 백성의 경제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사람도 70년후를 내다보고, 주변의 70개국을 내다보고, 자신의 주변 70사람을 돌아보면서 사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요셉은 풍년으로 흉년을 품었다. 흉년을 활용해 백성에게 양식을 베푸는 기회로 삼았다. 발상이 완전히 달랐다. 이분법은 안된다. 한쪽이 죽고, 다른 쪽이 사는 것은 바로왕의 꿈과 같다. 반면, 요셉은 풍년도 살고, 흉년도 살게 한다. 이것은 비유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살고, 이방백성 이집트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뜻이다. 풍년이 흉년을 품듯,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품었고, 야곱이 바로왕을 축복했고, 요셉이 형제를 품었고, 형제들이 요셉을 다시 얻었다. 이것이 창세기의 재탄생이다.
요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은 주범 유다의 참회 때문이다. 창세기 38장에 책갈피처럼 끼워진 독특한 이야기, 유다의 사연은 훗날 나오미가 데려올 룻을 예고하고, 룻은 결국 다윗을 낳게 된다. 유다는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이집트로 팔자고 제안한 주범이었다. 그 죄 때문에, 유다는 3아들중에서 두 아들이 죽게 된다. 엘과 오난이 죽었고, 셀라만 남았다. 며느리 다말을 속이면서, 유다는 셋째 셀라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며느리를 통해 두 쌍둥이를 낳는다. 잃었던 두 아들을 다시 얻게 된 것이다.
두 아들을 잃고, 원치않은 쌍둥이를 얻은 유다는 ‘운명의 감옥’에 갇혔다. 유다는 자신이 처한 깊은 구렁텅이에서 요셉의 울부짖음을 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참회한다는 것은 같은 위치에서 같은 슬픔과 고통을 경험할 때 마음이 움직인다. 구약의 유다는 긴 세월을 통해서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었고, 아마도 유다는 ‘요셉’을 멀리했던 마음을 돌이켜서 ‘베냐민’을 같은 형제로 품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없는데, 갑자기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피해자 요셉과 가해자 유다는 22년후 재회하는데, 위치가 바뀌었다. 요셉이 갑이 되었고, 유다는 을이 되었다. 요셉이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유다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그 상황에서, 유다는 베냐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기꺼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길 자청했고, 요셉은 복수를 용서로 바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형제애가 어디에 있을까? 구약의 유다와 요셉은 상호 결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 요셉의 하나님은 모두 살리는 하나님이다. 풍년으로 흉년을 살리고, 가해자 형제를 살리고,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살리고, 왕족과 백성을 살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화해하는 용서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부분이 있다. 왜 바로왕의 꿈을 요셉이 풀었을까? 바로왕의 문제를 왜 요셉이 해결해줬을까? 요셉은 2명의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았다. 보디발 아내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을 때 과감히 뿌리쳤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보디발 아내는 요셉을 감옥에 넣었다. 요셉은 감옥에 갈지라도, 보디발 아내의 문제는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떡관장의 문제도 풀어주지 않았다.
반면, 보디발 장군의 문제, 술관장의 문제는 풀어줬다. 그리고, 결국 바로왕의 문제까지 풀어줬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시중을 들면서, 왕궁 감옥에 살면서, 바로왕의 인품에 대해 듣고 파악하고, 덕망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만약, 바로왕이 헤롯왕과 같았다면…… 헤롯왕은 동방박사에게서 ‘유대왕의 전설’에 대해 듣더니,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덕망이 없는 군주의 문제는 함부로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3번의 전투를 가졌다. 첫 번째 전투는 믹마스 전투이며, 요나단의 활약으로 승리한다. 두 번째 전투는 엘라 전투이며, 갑자기 나타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승리한다. 마지막 전투는 길보아 전투인데, 이때 다윗은 사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해결해 줬다면, 다윗은 아말렉에게 자신의 모든 가족과 재산을 뺏겼을 것이다. 항상, 댓가가 따른 법이다. 요셉이 바로왕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왕족과 백성은 구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흉년때 대비를 하지 못한다. 댓가가 있는 것이다. 바로왕이 요셉의 말을 듣고, 그 정보만 취하고, 사람은 버린다면, 요셉은 토사구팽당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바로왕의 문제를 풀어주고, 귀한 정보를 제공했다. 무엇을 믿고 그렇게 했을까? 바로왕이 다시 감옥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인데…. 요셉은 바로왕이 인재를 알아보는 군주인 것을 알았다. 덕망있는 군주앞에 요셉은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거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처럼, 맹자처럼, 군주앞에 자신을 소개한 것과 같다. 사울은 덕망이 없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바로왕은 덕망이 넓어서 요셉을 인정하고 권력을 나눠가졌다. 덕망이 높다는 것은 권력과 재물을 함께 나눌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