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아멘!! 오늘은 4월 11일 창세기 11장을 읽었다. 노아의 홍수심판이 있고, 사람들은 동쪽으로 계속 옮겨간다. 성경에서 ‘동쪽’은 세상의 방향이다. 성을 더 튼튼하게, 먹거리를 더 풍족하게, 도시를 건설하면서 드디어 바벨탑의 건축문명이 시작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하셨다. 하나님은 서로 혼잡하게 하실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
여기와 연결된 성경적 비유로 ‘구두쇠 부자’ 비유(눅12장)가 생각난다. 구두쇠 부자는 풍족했는데, 재물과 곡식이 더 늘어나자, 창고를 더 짓다가, 하나님께서 영혼을 부르시면서 생을 마감한다. 인생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재물과 권력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이 땅을 떠나는 순간에 소유권은 상속법에 따라 분배된다. 아무리 많아도 상속법은 죽은 자에게 넘겨지지 못한다.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왜 바벨탑을 허물었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바라지 않는 일에 협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언어가 혼잡하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고, 뜻이 틀어지는 것이다. 상황과 여건이 틀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성공하는 것이 바벨탑이면, 무너지는 것이 낫다. 실패하는 것이 뜻이라면, 망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니, 바벨탑 건설중단을 선언하는 것이 옳다.
예수님은 ‘성전멸망’을 정녕코 예언하셨다. 공간을 통한 예배제도를 ‘사람성전 중심’으로(요4:23) 개혁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선언 이후, 어디서든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고, 모든 성도가 성전이 된 것이다. 아멘!!
창세기 11장 1절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과 연결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다”는 표현과 일치한다.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해당한다. 하나의 언어로 울려퍼지는 곳이 있다. 북한이다. 그곳에는 오직 김일성의 말씀, 김정일의 말씀, 김정은의 말씀이 있다.
언어도 하나, 말도 하나면, 소통이 되지 못한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언어의 창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다”라는 말이 아름답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무서운 표현이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면,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 모든 종교마다 자신의 교리가 진리라고 외치니, 수십만개의 진리가 결국 혼돈에 빠진다. 진리는 결국 다양한 것이다. 이 세상에 온전한 진리는 없다. 진리가 있다면, 성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