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다. 누가복음 7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한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전한 것일까?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을 정도니, 요한은 사생결단하고 물었다.
7장에는 4가지 사건이 나온다. ① 백부장의 종 치료 ② 나인성 과부의 독자 ③ 세례요한 의심 ④ 향유옥합 사건이다. 그 중에서 백부장의 아들을 치료한 사건에 대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어떻게 이야기했을지, 물음표가 제기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을 보고, 인식한 대로 말해준다. 옥에 갇힌 세례요한은 한정된 정보로 판단하니, 그 또한 고달픈 일이다. 인생은 누구나 옥에 갇힌 상태로 정보를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처럼 당사자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부장 사건은 마태복음 8장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왕의 신하로 언급된다.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병사는 헤롯왕이 징집한 용병이었을 확률이 높다. 대한민국으로 보면, 주한미군의 사령관에 해당되는 영향력있는 인물이다. 100명의 특공대를 거느린 부대장교이니, 가버나움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 또는 백부장의 아들을 살려주셨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고달픈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긍휼함을 베풀어서 구원의 사역을 행하신 것인데, 세례요한 제자들은 ‘백부장’에 방점을 찍을 수도 있다. 똑같은 사건인데, 무엇을 보느냐로 완전히 달라진다. 게다가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이러한 모든 것을 옥에 갇힌 요한에게 말했다면,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찌 생각하겠는가?
구두언어는 현실성이 있으며, 전달해준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전달되지 않는다. VDO로 녹화하고, 녹취록을 전해줘도 모든 것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 현장에서 그 분위기로 사람들은 감정을 교환하면서 어떤 뜻을 전달한다. 그러한 미세한 내용은 녹취되지 않고, 마음은 전달되지 못한다.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들은 내용에 대해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제자들을 보내서 물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인격이다.
예수님은 사명을 확인하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 인격적으로 답해주신다. 질문을 받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의심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의심이 일어난 것은 인생의 다반사이다. 의심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의심이 되는데, 의심하지 않은 것처럼 숨기고 있다면 의심이 불신이 되고, 불신이 배신이 된다. 의심이 생겼을 때, 질문을 하고, 확인을 해야한다.
[눅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고 들은 것’이다. 세례요한이 보고 들을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2천년이 지났다. 현대인은 이 땅의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요한과 같다. 오실 그 이가 예수님인지, 다른 누구를 기다려야할지, 매우 곤혹스럽다. 그때마다 믿는 성도는 세례요한의 질문을 되새김질해야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