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탕을 먹고 남은 양은(洋銀) 냄비 바닥에서 내 초췌(憔悴)한 몰골이 보이는 듯 하다. 몸살감기 아픔은 양은 냄비 바닥이다. 그 무엇도 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조언은 그 무엇을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만큼 고단하다. TV는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의 성격을 놓고 옥신각신한다. 그날, 무슨 이유로 김정은이 쐈던지, 미사일보다 ‘말의 미사일’이 핵폭탄급이다.
전쟁공포는 전쟁만큼 영향력이 있다. 징기스칸은 ‘평화의 사명자’로 자신을 선포하면서, 반드시 몇 명의 포로를 풀어줬다. 그들이 당한 끔찍한 참상과 공포를 인근 마을에 알려주기 위함이다. 공포의 심리전쟁이다. 공포탄은 실탄만큼 효력을 미친다. 심리전쟁은 미사일보다 ‘미사일의 성격’을 가지고 따지면서 점점 극대화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공포의 대왕’이 이런 것일까?
오늘은 약속된 취재에 가지 못하였다. 몸살 감기 때문에 거리 이동이 힘들 뿐만 아니라, 혹여 공동체속에서 전염병의 유포자가 될 공포가 엄습하니, 그 또한 고달프다. 양은 냄비 바닥처럼 있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놀랍게도, 취재에 가려고 했던 곳의 학장님도 몸살감기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환자로서 고달픈 내가 이제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리는 이해심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온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문자를 보내드렸다. 같은 병에 걸리면 긍휼의 마음이 서로 생기는 법이다.
憐(불쌍히 여길 련)은 이웃 린(隣)과 흡사하다. 이웃은 서로 불쌍히 여기는 관계를 말한다. 어쩌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거의 죽게 된 자를 구제한 것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 고통을 당한 자는 같은 고통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기가 상당히 힘든 법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도자 위치에 있다보니, 거의 죽게 된 자를 보면서도 ‘관찰자’로서만 살피고, 마음은 외면한다. 반면, 여행자로 표현된 그 사마리아인은 ‘거의 죽게 된 자’를 보살피고, 여관까지 데려가서 병간호해주고, 극진히 살펴주었다. “고통이 사명이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