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숙(최명길)과 강미리(김소연)이 서로 만났다. 둘은 엄마와 딸의 관계인데, 전인숙이 어린 시절 버렸다. 큰 엄마에게 버렸고, 전인숙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강미리는 친엄마에 대한 혈연적 막연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고, 전인숙은 갑자기 출현한 딸로 인해 매우 당혹스럽고, 빨간 신호등이 켜진 상태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 체계에 있어서, 인식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전인숙이 딸 강미리를 불러서 우아하게 식사를 한다. 딸을 향한 엄마로서 배푸는 자애로운 식사인데, 딸은 부담스럽다. 왜냐면, 혈연적으로는 엄마이지만, 인식론적으로 엄마가 될 수 없어서 그렇다. ‘엄마’는 곧 인식에서 느끼는 언어적 실체이지, 혈연으로 통해서 맺어지는 관계는 아니다. 혈연적 관계는 하나의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 모녀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전인숙 : 넌 내 딸이야. 상반기 실적이 대박인 것을 보니, 내 딸이 확실해!
강미리 : 감사해요.
둘의 대화가 겉돈다. 전인숙은 “내 딸”이라는 말로서 강미리가 살아온 과거의 모든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 딸”이면서, “작은 엄마의 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정해야한다. 전인숙이 강미리를 향해 “내 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혈연적 관계에서 “내 딸”일 뿐, 인식론적 모든 사연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인숙은 강미리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엄마’에 대한 관념에서, 강미리는 혈연적 엄마와 사연적 엄마(박선자)를 모두 갖고 있는 특별한 경우다. 배가 아파서 낳은 엄마가 있고, 가슴으로 낳은 엄마가 있다. 박선자가 설령 강미리를 낳지 않았어도, 친딸로 인식하고, 그렇게 키웠고, 강미리도 친엄마로 이미 알고서 살았으니, 친엄마가 되는 것이다. 엄마는 혈연적 관계와 친밀적 관계가 모두 섞여서 상호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관계여서 그렇다. 모녀가 만약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라고 한다면, 전인숙이 강미리를 만나자 마자 ‘모녀’가 되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친자확인소송에서 법률적 모녀관계가 성립될 뿐, 사회적 관계에서 모녀관계는 되지 못한다.
강미리가 부담스런 친엄마와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 왔는데, 박선자는 김치통을 들다가 허리가 삐끗하면서 넘어져 있다. 김치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서 거북이가 드러눕듯이 아파서 소리친다. 강미리는 그런 엄마를 향해 “엄마”하고 달려든다. 혈연적인 관계로는 박선자가 엄마가 아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관계여서 그렇다. 강미리는 박선자가 곧 엄마다. 사회적 법률이 생활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인식론에 의한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박선자와 강미리의 독특한 관계, 그것은 가족관계에 있어서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