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는 가사를 어떻게 부를지 자세히 나와있다. 어떤 단어에 힘을 주고, 어떤 단어을 높게, 낮게 부를지 악보에 따라 달라진다. 도돌이표가 있으면 다시 돌아가서 2절을 부른다. 작곡가는 가사에 따라 곡을 쓰고 붙인다. 간혹 편곡을 한다. 편곡을 할 때는 반드시 ‘편곡’이라고 붙인다. 원래 작곡가가 의도한 느낌의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나는 서울교육방송 보도국장이다. 내가 명함을 내밀면, 상대는 내가 ‘교육방송’(EBS) 보도국장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만약, 착각했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며, 내가 묵인하고 ‘교육방송의 보도국장’ 자리에 앉게 되면 낭패를 당한다. 저는 ‘인터넷 뉴스입니다’라고 꼬리표를 붙여준다. ‘인터넷 뉴스’라는 말이 ‘EBS가 아니다’는 뜻이다. 그래도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EBS와 다른 언론사’라고 구분한다. 이것이 정보의 함축성이다.
성경에는 ‘가사’만 나와있다. 그래서 가사의 내면에 흐르는 ‘함축된 뜻’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물론, 노래 가사도 그러하지만) 성경의 악보는 문장의 맥락으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단어와 단어가 연결된 것과 설정된 배경을 실제로 상상하면서, 함축된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해석은 성경구절에 들어있는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조심할 것이 있다. 함축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끌어내서는 안된다. 이러한 행위는 거짓말이다. 서울교육방송이니, ‘교육방송의 자회사’라고 우기면, 그것은 사기다. 이와 같다.
성경은 대충 단어들의 연결로서 이러하니 이것이다라고 할 경우, 반드시 단서를 달아야한다. ‘하나의 의견이다’라고 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선언하고, “다른 해석은 비진리다”라고 할 경우, 그 말을 한 사람의 해석은 비진리가 된다. 성경해석은 결코 하나로 정해질 수가 없다. 언어의 함축성 때문이다.
인류는 수천년동안 수만명, 수백만명의 성경 탐험가들이 성경의 진리를 해석함으로 성경의 깊은 비밀을 열어놨다. 그중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지식의 나무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모두 탁월한 논증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정답이 될 수 있다. 성경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의 책으로서, 인류에게 주는 다양성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서 “선악과는 000이고, 생명나무는 000이다”라고 확정하면, 그 순간 다른 모든 성경해석은 물거품이 된다.
그러한 나머지 성경해석은 해달별의 추락이 결코 아니다. 겸허하고, 진실하고, 낮아지고, 한국언어에 있는 겸양의 미덕으로서 “이러한 해석이 있는데, 이 해석은 어떠한 책에서 배웠고, 삶속에 이러한 유익이 있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오류도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적 성경해석’은 결국 비판의 화살을 받고 사장(死藏)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