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탕자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 효도 이야기인 줄 알았다. 몇 달전 성경속 깊은 비유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랬다. 비유가 심해처럼 깊음을 처음 알게 됐다. 이후 성경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차자는 집을 떠난 탕자, 장자는 아버지 마음을 떠난 탕자라는 해석이 압권이었다. 차자는 집밖의 탕자, 장자는 집안의 탕자였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바리새인을 암묵적으로 지칭하며, 읽는 독자에게는 ‘자칭 의인’의 바리새인적 신앙인을 뜻한다.
유산을 먼저 상속받고, 차자는 뭔가 해보려고 먼 타국에 갔으나, 그곳의 경기가 좋지 않고, 흉년이 들어서 사업이 망했다. 돼지농장에서 빌붙어 살다가, 그제서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을 아버지의 품꾼에 비유한다. 아!! 인생은 하나님앞에서 이렇게 낮아짐이 합당하다. 그런데, 꼭 사업이 망하거나, 허랑방탕해야 현실의 고난으로 하나님을 붙들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리고, 탕자는 참회한다.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한다. 홀로 독백을 연습한 것일 수도 있고, 진실로 뉘우친 것일 수도 있다. 그 고통에 처하면, 그 눈물이 나오게 된다.
차자가 멀리 보이니,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 마음을 이미 아시고 부등켜 안으신다. 돌아오는 것이 곧 참회의 온전함이다. 아버지의 뜻을 배역하고 떠났을 때, 아버지는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어느날 돌아오니, 그 아들이 성공했던, 망했든, 그것은 따지지 않고, 아들의 얼굴을 보고서 측은히 여기면서 사랑하였다. 몰골을 보니, 망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서 잔치를 했다.
그런데, 맏아들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데 풍악소리가 들리니 종을 불러서 물어본다. 종의 말을 들은 큰 아들은 분노한다. 모든 사건은 당사자의 말을 직접 들어야지, 제3자의 말을 듣거나, ‘종’에 해당하는 자의 말을 들게 되면, 피상적인 정보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 있다. 종이 큰아들에게 전한 말과 아버지가 전한 말은 천양지차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잔치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관점과 종의 관점이 다르다. 장자는 아직 아버지의 관점을 듣지 않았는데, 종의 말을 먼저 들으면서 아버지와 간격이 벌어진 것이다. ‘종’은 큰 아들의 귀 역할을 하는 누군가였을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던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연출된다.)
그때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에게 잔치에 들어가자고 하니, 큰 아들이 성질을 내는데, 아버지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하시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이중성이다. ‘우리’는 큰 아들이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서 잔치에 들어간다면, ‘우리’에 포함되는 것이고, 만약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반대한다면, ‘우리’라는 그 단어에서 더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큰 아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배제된 ‘우리’(아버지와 작은 아들과 손님들)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사용한 ‘우리’는 분명 큰아들을 포함한 ‘우리’다. 왜냐면, 그 대화를 하는 그 순간에는 큰 아들과 아버지만 있으니 그렇다. 큰아들에게 ‘우리’라는 말로 포용하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처럼 넓은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