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차별과 다름과 특별의 단어만 나오면, 한국문화는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이 단어는 민감한 뇌관이며, 금기어로 구분된다. 반면, 같음과 함께와 협력과 조화와 평등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차별은 틀리고, 함께는 옳은가? 구분하는 것이 나쁠까?
이분법(二分法)은 경계해야한다. 그러나,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분법을 경계하려고, 구분 자체를 없애면, 사회는 아메바처럼 흐믈흐믈해지고, 거짓 투성일 수 밖에 없다. 구분은 반드시 필요해서 그렇다. 창세기 창조과정은 ‘구분에 의한 창조’였다.
창세기 1장에서 분명 빛과 어둠을 나눈다. 이분법이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이분법이 아니다. 사람은 이분법으로 구분한 다음에, 선악으로 지칭한다. 사람이 사용하는 이분법이 악한 것은 ‘선악의 구분’을 포함해서 그렇다. 갑을논쟁에서도 항상 갑은 ‘선’(善)이고, 을은 ‘악’(惡)으로 구분된다.
만약, 누군가를 선택하면, 그 선택이 구분이다. 구분은 ‘차이와 차별과 특별’을 만든다. 이것은 상식이다. 예수님이 12사도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다른 제자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특별한 제자들 12명을 구분한 것이 성경 복음서에 나온다. 또한 제자들을 무리와 구분했다. 이것만 보면, 이분법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구분한 다음에, “소금과 빛”을 말씀하신다. 선택한 목적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세상적 이분법과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체계의 개방형 소통이라고 한다.
(체계를 환경과 구분하면, 그 체계는 반드시 환경과 관계를 맺어야한다. 환경이 없는 체계는 죽은 것이다. 체계가 환경과 구분되면, 환경입장에서는 체계가 환경이 된다. 남한이 북한과 구분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그 순간, 북한은 남한과 구분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한다. 교회안에 세상적인 요소가 넘쳐난다면,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가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야하며,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만,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差 : 工을 ‘一’과 ‘ㅗ’로 분해할 수도 있다. ‘ㅗ’는 손(一)과 집게(ㅣ)를 상징한다. ‘ㅗ’가 ‘一’을 잡고 있는 모습이 ‘工’이다. 이는 대장장이의 왼손(左)을 의미한다. 대장장이는 왼손에 단련할 연장을 잡고 있고, 오른손(右)에 망치를 들고 있다. 이런 이유로 左는 만들 연장을 들고 있는 모습, 右는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差는 오른손의 망치가 왼손에 들고 있는 연장을 때려야하는데, 손을 때린 모습이다. 그래서 ‘어긋나다’는 뜻이 나왔고, 발음은 망치가 손에 맞았으니 ‘차’가 된 것이다.
異 : 탈을 쓰고 굿을 하는 무당을 뜻한다. 무당은 일반 백성과 구분된 특권층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