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교회에서 모리아산 이삭 번제사건에 대해, “부자(父子)가 올라갈 때는 같이 갔지만, 내려올 때는 따로 내려왔다. 아버지에게 이삭이 정이 뚝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창세기 22장 19절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이다. 아브라함은 외동아들 이삭을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사랑하였다. 번제로 바칠 정도로 훈육하는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아버지같지 않다”는 욕을 얻어먹을지라도 아브라함은 행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통해서 부자간의 인연을 끊고, 이삭이 하나님을 찾도록 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무서운 성격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찾았을 수도 있다. 성경속 인물들이 기계인간처럼 믿음이 금방 생겼을 것으로 착각했던 나의 모순이 망치로 철저히 부서지는 설교였다.
모리아산에 올라갈 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다정다감하다. 이삭이 번제나무를 짊어졌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서 둘이 함께 동행하며,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정상에 도착해서, 제단을 모두 쌓고, 아브라함이 갑자기 돌변해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갑작스럽게 일어난 몇분의 순간일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이삭은 믿어질리 만무하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살인자이지, 구원주로 생각될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삭을 축복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삭을 축복한 것이다. 사람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삭을 축복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이삭을 잡듯, 예수님이 베드로를 잡고서 함께 십자가를 지자고 했는데, 단호히 거절한다. 예수님이 체포당했을 때, 하나님은 여종을 통해서 3번의 기회를 부여했지만,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면서 십자가를 거부했다.
이삭은 선택할 기회가 없어서 체포당해서 번제물이 되었고, 베드로는 선택할 기간이 너무 많아서 도망쳤다. 그런데,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스스로 결박의 체포를 받으시고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참된 이삭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순종한 이삭을 위해 아브라함은 결혼할 짝을 구해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인류의 구원주로 삼으셨다.
*** 모리아산 번제사건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의 감정변화는 하나의 성경해석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