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所有)는 있는 것이다. 있을 유(有)는 손(右)에 고기(月)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내 것”을 뜻한다. (핸드폰을 든 모습도 된다.) 동산의 소유권은 손에 쥘 때 발생한다. 전쟁은 소유권의 탐욕으로 발생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전쟁은 없지만, 돈의 전쟁으로 소유권을 부풀리면서, 돈의 제국을 완성한다. 돈을 가졌다면, 과연 그것이 내 것일까? 혹은 십일조는 주님의 것이고, 9/10는 내 것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했는데,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것인가?
누가복음 12장 ‘부자의 창고 증축공사’ 비유는 어떤 제자의 상속재산 분쟁 소송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예수님께 민원을 제기한 동생의 형(兄)이 제자인지, 아닌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묻는 자가 12사도에 속했다면, 질문을 던진 자는 안드레이거나 사도 요한일 수 있다. 형이 상속재산을 독차지하고 주지 않자, 동생이 예수님께 “형에게 명령해서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정황과 맥락을 보면, 상속재산을 물려받은 형에게 예수님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인 듯 하다. 예수님은 둘의 상속분쟁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거부했다.
부자의 밭에 풍년이 들자, 부자는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기로 마음 먹는다. 이것이 소유권이다. 그 부자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다.
그때 하나님이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부자는 ‘인식과 시간’으로 곡식과 물건과 창고를 소유한 것이다. 곡식과 물건은 동산이고, 창고는 부동산이다. 동산과 부동산을 부자가 소유한 것이 맞지만, ‘인식과 시간’으로서 소유한 것이다. 인식과 시간은 부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속했는가? 영혼은 누구의 소유인가? 시간은 누구의 소유인가?
지금 현재 “이것이 내 것이다”고 하는데, 그 시간이 곧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시간안에 살고 있다. 국회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맘껏 볼 수 있지만,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소유권은 ‘인식과 시간’을 벗어나면 불가능하다. 동산과 부동산의 소유권은 각 사람에게 속한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소유권 전체가 하나님께 속했다. 마치 인생은 ‘하나님의 인식과 시간’의 빌딩안에 거주하는 세입자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소유의 개념이다. 시간의 하나님안에서 우리는 소유권을 임시로 주장하고 누릴 뿐이니, 주와 함께 누리고 먹고 마시고 합당하게 써야할 것이다.
(누가복음 12:28~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중략)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