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몽롱하여도, 1부와 2부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영성에 유익한 것 같다. 환상으로 뭔가 보이거나, 혹은 믿음의 대확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믿음은 겨자씨처럼 어제와 거의 동일하거나, 비슷하다. 어제 했던 대로 오늘도 성경 강의를 하거나, 칼럼을 쓰고, 서울교육방송을 어떻게 운영할까, 이리저리 고민하고, 제보받은 내용을 검토하면서, 저녁에 뭘 먹을까, 그냥 고민하면서 휴일을 보낸다. 성경책과 신앙서적을 읽는 것은 언제나 내게 감성과 영성을 자극한다.
열린다 성경(류모세)을 읽고 성경을 보는 관점이 새롭게 확장되었다. 문화적 관점에서 성경을 오해하고, 편견을 가졌던 무지를 인정하였다. 모르면, 무식이 담대하다. 알면, 벼이삭처럼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검토한다. 인생은 스스로 옳다고 믿어도, 그 믿음이 때론 엉뚱할 때가 많다. 그래서 겸손의 방석에 앉아야한다. 그것이 지혜다. 겸손의 방석은 곧 “끝자리”다.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논증을 펼치는 것이 지혜의 비결이다.
성경은 단순하지 않다. 살아있다. 창세기 1장 사건은 성경 곳곳에서 재현된다. 가령,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로 운영된다고 했다. 이 구절은 홍해바다를 건널 때, 하나님의 영이 바다를 가르고,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두 창세기 1:2과 연결된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 살아있다. 말씀이 말씀과 연결되면서, 영성을 창조한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면은 ▲홍수심판 ▲엘리야 ▲홍해바다 ▲길갈 할례사건 등등 수많은 사건이 중첩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요단강 세례를 준 것은 구약의 여러 사건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건은 하나이지만, 성경속 여러 사건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새로운 영성의 창조가 일어난다. 부싯돌 창조와 같다. 부싯돌로 서로 부딪히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요단강 사건에 구약사건을 연결해서 부딪히면, 영성이 불꽃이 일어난다. 나아만 장군의 요단강 목욕 사건도 요단강 세례와 연결해서 보면, 새로운 영감이 일어난다. 이것이 성경의 창조적 상상력이다.
그렇다면, 신약사건과 구약사건은 아무렇게나 연결해도 될까? 기준은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해서 상상력을 펼쳐야한다. 예수님이 배제된 채, 이단교주가 드러나도록 성경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그것이 적그리스도이다. 성경은 문학작품이지만, 일반 문학작품과 다르다. 일반 문학작품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성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는 구원의 비밀이 담겨있다. 비유를 해석할 때, 매우 조심해야한다. 비유의 해석이 만약 예수님과 어긋난다면, 그 비유는 구원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을 읽어보면, 마귀들도 영성과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마귀가 보여주는 지혜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정도로 마귀가 보여주는 일시적 지성과 영성은 흡인력이 강하다. 누군가 영적으로 뭔가를 봤다면서 ‘성령의 계시’를 말하면, 사람들은 금방 휩쓸린다. 성령의 계시가 오더라도, 그 계시가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에서 벗어나면, 사탄계시다.
마태복음 4장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3대 시험에서 마귀는 3가지를 보여준다. 돈, 경제, 능력, 부귀영화, 권력 등을 제안하면서,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했다. 마귀는 세상적인 것을 보여주면서 성도를 유혹한다. 그 방면의 소질이 있다. 마귀가 눈뜨게 하는 것은 돈, 능력, 권력 등이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갔을 때, 그때 눈이 열렸다. 그때 봤던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공통점은 권력을 버린 인물이다. 모세는 이집트의 차기 대권주자 권력을 버리고, 광야생활을 택했다. 엘리야도 부국강병을 원하는 아합왕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3년동안 방랑생활을 했다. 엘리야와 모세를 보여준 다양한 목적이 있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달았을 때, 죽는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의 본질’을 알지 못하니,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주면서, 죽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참뜻도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다양한 상상력을 가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