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누가복음 10장에서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찾아가는 선교활동’을 펼치셨다. 1주~2주 정도로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 베다니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 머물면서 그 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발치에 앉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이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1)
마르다의 이름을 2번이나 연거푸 부르신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마리아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자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다. 눈을 비비고서 서로 대하여 볼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완벽한 괄목상대를 이루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눈을 비비고 봐도 못 알아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도마는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서야 예수님인줄 믿었다. 예수님께 크게 야단맞은 마르다는 그후 어찌 되었을까?
누가복음과 다르게,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무려 2장에(11,12) 걸쳐 서술된다. 그것도 십자가 사건과 맞물려서 핵심부에 위치한다. 십자가 사건 뒤에 부활사건이 있다면, 십자가 사건 바로 앞에 나사로 부활사건이 있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가정은 변두리에 위치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핵심부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모두 중요한 핵심인물이다. 나사로까지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증거자가 되었다.
마르다는 확실히 괄목상대했다. 누가복음 10장의 일침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을 어귀에 나가서 먼저 영접한 사람은 마르다이지, 마리아가 아니다. 마르다가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마르다가 부르니 마리아가 갔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베드로에게 전해주듯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수준도 달라졌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중략)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11:18~29)
나사로의 부활은 12월~1월로 추정한다. 수전절이 단서다. 3개월이 지나고, 유월절 엿새 전의 날짜가 되었다. 3개월동안 마리아의 신앙에 깊은 침묵과 반성과 참회가 있었을 것이다. 오빠 나사로를 통해서 마리아는 자신의 참신앙을 돌아봤을 것이다. 그때, 향유옥합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향유옥합”으로만 생각하는데, 마리아의 신앙은 사인곡선처럼 굴곡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마리아에게 신앙의 변곡점은 오빠 나사로의 죽음이었고, 마르다에게 신앙의 변곡점은 예수님께 말씀의 채찍을 맞았던 누가복음 10장이었다. 다윗에게 신앙의 변곡점은 밧세바 불륜사건이었다. 죄는 ‘깊은 추락과 부활의 날개’를 동시에 가져온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나는 마르다가 괄목상대한 변화를 이뤘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