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명이다. 해리성 장애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생물학적 자아(自我)가 있고, 남들이 생각하는 자아가 있다. ‘남들’에는 가족, 학교, 사회, 직장, 친구, 국가 등등이 속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나’도 무시할 수 없다. 사회적 위치가 곧 ‘나’이다. 이것은 중학교 2학년에 나오는 ‘사회적 역할’의 내용이다.
나는 ‘서울교육방송’을 운영한다. 처음에는 제호가 무척 좋았다. 내가 보기에 그러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교육방송’이었다. 내게는 치명적 단점이 되었다. 이후에는 “1인 미디어 서울교육방송”이라고 수식어를 붙였다. 수식어를 붙여도, 교육방송의 짝퉁 냄새는 지울 수가 없다.
짝퉁은 ‘거짓’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닌다. 짝퉁은 ‘짝퉁의 꼬리표’를 붙이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모순적 이야기지만, “이것은 짝퉁이다”면서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교육방송이 아닙니다”라고 차라리 말한다.
어떤 정보가 알려지면, 그 정보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그 정보가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의 매”를 부모가 들었으나, 그 매가 자녀에게는 정신적 결함을 일으킬 수도 있다.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로 인식될 수 있다. 때릴수록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단절된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박근혜 前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7시간의 행방을 숨겼다. 그때, 혼비백산했던지, 혹은 평상시처럼 행동했던지, 어떤 행동은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숨겼다. 숨긴 그 사실이 ‘불신’을 키웠다. ‘숨긴 것’이 국민에게 새로운 정보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나’는 여러 명이듯, 정보는 숫자가 아니다. 고정된 지식이 아니다. 정보가 드러나면, 그 정보가 어떻게 비쳐질지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 정보는 내용보다 담긴 그릇이 중요하다. 여기서 그릇은 외형적 모양도 있고, 전달하는 사람의 진실성도 있다. 내용과 그릇이 모두 ‘진실성’에 해당한다.
가령, “그래”라고 말했다고 하자. 액센트를 어떻게 하느냐로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는 ‘yes’가 아니고, 반문으로 믿지 못하는 말이다. ‘그래’의 정보가 어떻게 발음하느냐로 반대 의미가 될 수 있다. 모든 정보가 동일하다. 정보의 진실성에는 내용과 전달방법이 모두 포함된다. 전달방법을 일컬어 ‘제2의 언어’라고 한다. 내용은 텍스트, 전달방법은 홍보전략이다.
** ‘나’에는 최소한 3명의 ‘나’가 존재한다. 1) 생물학적 나, 2) 내가 생각하는 나, 3) 남이 생각하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