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요단강은 서울의 한강과 같다. 조선시대에 한강은 강북과 강남을 나누고, 강북을 수도로 규정하고, 강남은 외곽으로 봤다. 한양(漢陽)은 한강에서 양쪽 방향이다. 강북이다. 요단강을 기점으로 좌측이 가나안이다. 요단강을 건넌 것은 약속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곧 지성소를 상징한다. 모세의 율법을 의지하고, 40년의 신광야 시절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간다. 이것이 요단강의 세례 사건이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언약궤가 요단강속으로 들어가서 건넌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사건 이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가나안에 들어간다. 여호수아는 곧 예수님이고, 갈렙은 세례요한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완전히 따르지 못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요단강을 기점으로 우측에 남아있던 족속이 있었다. 르우벤 지파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따르지는 않았지만, 세례요한의 제자중에서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따랐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세례요한의 영적 의미가 매우 다르다. 공관복음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인데, 사람들이 임의로 대해서 참수를 당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은 전혀 다르고, 세례요한의 증거사역이 안드레와 요한과 제자 공동체에 위임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르는 것과 따르지 않는 것은 선택에 불과하다. 언약궤와 같은 예수님이 요단강을 건넌 것이 중요하다.
이제, 누구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신뢰하고, 십자가를 삶속에서 짊어진다면, 요단강을 예수님과 함께 건넌 것이다. 이 요단강은 현실세계를 건너는 것이다. 세상가치로부터 이탈, 곧 별세요, 말세다. 요단강은 신광야와 같은 세상가치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세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삶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다. 하나님의 영생은 지금 현재에 임해서 영원의 무한대로 확장한다. 죽음 이후에 영생문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요단강을 건너야, 영생이 임한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