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나는 착하게 살았다. 세상속에서, 교회에서 착하게 살려고 많이 애썼다. 도덕은 축복을 가져오는 기준임을 믿기에,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의 영향이 컸다.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해야하는데, “교회 믿는 사람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면 안된다.
최근, 설교말씀에서 ‘산위의 동네’와 ‘반석위의 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하나님이 보시는 영적 수도요, 청와대이니,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해야할 착한 행실은 과연 무엇일까? 소금과 빛은 ‘착한 행실’의 비유다.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은, 세상이 원하는 착한 행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착한 행실을 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내가 세상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착한 행실을 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그렇다. 왜 그럴까? 교회의 사회봉사 운동은 계속 해야겠지만, 지역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진실로 해야할 ‘착한 행실’은 무엇일까? 어떤 행실을 해야,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까?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은 대속적 그리스도를 뜻한다. 대속적 그리스도는 죄사함을 위한 희생의 어린양이다. 어린양의 번제물이 없다면, 죄사함도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위한 거룩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착한 행실’인 것이다. 십자가는 빛과 소금이며, 대속물이며, 어린양의 제물이다.
요나서 1장에도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풍랑이 일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풍랑이 잠잠해지고, 배에 있던 자들은 구원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요나의 착한 행실은 버려짐의 대속물이다. 또한 요나는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원하지 않는, 그들이 불편할 “회개하라”는 설교문을 반포했다. 강대국에게 약소국 출신 요나의 외침은 잠자는 사자를 건든 쥐새끼와 같았다. 쥐새끼같은 요나의 설교가 니느웨성의 지도부를 흔들었다. 그들은 회개했다. 요나의 착한 행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그것이 ‘착한 행실’이다.
교회는 시대앞에 성전기능을 해야한다. 각 개인은 삶속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국가에서, 친구관계에서, 성전기능을 담당해야한다. 도덕은 넘쳐난다. 도덕은 죄를 인지하는 돋보기 역할이다. 더러운 죄는 누가 청소하나? 성전은 죄를 청소하는 영혼의 청소부 역할을 담당한다. 새벽, 오물냄새를 온몸에 뒤집어 쓰고 청소부와 청소차는 새벽골목을 휩쓸고 지나간다. 더럽게 살아가는 청소부가 있어서, 거리는 청결해진다. 인류의 청소부가 되신 예수님의 대속적 착한 행실이 있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