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신랑신부 비유를 통해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운동이 거세지면서, ‘메시야들’이 많이 출현했다. 마치, 통일신라 말기에 고구려 부흥운동과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듯, 민중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마태복음은 “예수운동이 곧 메시야 운동”이라고 못을 박았다. 다윗왕권이 예수님께 계승됨을 보여주려고 족보를 맨 앞에 실었다. 예수님은 왕이고, 우리는 백성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왕이신가?
마태는 헤롯대왕의 유아 대학살을 초입부에 실었다. 마태가 살던 그 시기에도 헤롯성전은 계속 건축중이었다. 헤롯대왕은 ‘새로운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유아 대학살을 일으킨다. 헤롯이 보여주는 권력의 본질이다. 반면, 예수님은 태어날 때 “그 백성을 백성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서 오셨다. 군림하고, 죽이는 왕이 아니고, 백성을 위해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왕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나타내는 비유도 있다. 마태복음 25장 비유다. 이단교회는 해당 비유를 ‘부자관계’가 ‘신랑신부관계’로 발전한다고 하는데, 말도 안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서, ‘신랑과 신부’로서, ‘주인과 종’으로서, ‘농장주인과 품군’으로서, ‘농장주와 소작농’으로서 다양하게 설명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인간의 언어로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마태복음 3장에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고 말씀하시고,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누가복음 15장 ‘아버지와 두 아들’ 비유에 나타난다. 비유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다양한 속성을 나타내므로, 깊게 음미해야한다.
천국은 열 처녀와 같다.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그렇다면, 왜 천국은 다섯 처녀와 같다고 하지 않았을까? 천국은 열처녀와 같다. 미련한 다섯 처녀도 천국이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도 천국이다. 이 비유는 참 신비하다.
이단종교들은 “신랑을 맞으라”고 하면서, 자신이 신랑의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이 비유를 들이민다. 거짓복음이다. 신랑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죽고, 무덤에 있다가 3일후에 부활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맞이했고, 그날 저녁에 사도들도 맞이했다. 40일간 부활의 혼인잔치가 진행됐다. 그리고, 혼인잔치 비유는 지금까지 진행중이다. 신랑이신 주님은 인간적인 사랑의 관계와 완전히 다르다.
천국은 열처녀와 같고, 미련한 다섯과 지혜로운 다섯이 있는데, 모두 졸며 잠을 자고 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은 졸며 자는 열처녀와 같다. 그때가 되기까지 누가 신랑을 맞을지, 아무도 모른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니, 그제서야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았다. 인생은 신랑이신 주님이 오셔야, 혼인잔치가 시작된다. 신랑이 올 것을 진실로 믿고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천국은 신랑을 맞은 다섯 처녀의 비유가 아님을 유념하자!!)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음성이 들렸을 때는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기름이 없는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해당 비유는 마지막 때가 오기전에 미리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닥쳤을 때에 그때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늦다. 신랑이신 주님께서 신부들에게 사랑의 혼수품을 미리 준비하도록 챙기신다. 이런 신랑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신랑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까지 챙겨주신다. 그 사랑이 곧 성령이다. 신랑이신 주님을 언제 맞을지 모르니, 날마다 파는 자에게 가서 기름을 구입해야한다. 성령을 날마다 찬양과 기도로 간구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찬양과 기도가 안될 때는 평소에 중보기도를 부탁해야한다. 미리 미리 챙기자!!
** 마태복음 25장 열처녀 비유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미리 사랑의 기름을 준비하라는 것이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한다는 비유가 아니다. 사랑의 주님은 “깨어 있으라”고 경종을 울리면서, 성령으로 평소 주님과 교제할 것을 언급하신다. 등불의 비유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듯, 산위의 동네이며,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착한 행실이다. 사랑의 신랑이 신부의 사랑까지 준비해서, 성령으로 임하신다. 세상적인 연인관계로서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