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응급조치를 한 착한 사마리아인
오늘은 9월 10일 누가복음 10장을 읽었다. 주님은 70문도를 세우고, 이스라엘 각지에 파송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같다고 주님을 말씀하셨다. 빌라도 총독, 헤롯 정권이 예수의 천국운동을 매우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님을 어떻게 잡아 죽일까, 본격적으로 논의하던 시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할 이스라엘 12지파가 권력의 괴물에 넘어갔다. 로마제국도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 섬으로 휴양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제국의 평화와 번영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의 영달과 감정과 권력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하였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점이니, 박해의 불길은 더욱 거셌다.
주님께서 70문도를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보낸 것은 죽은 심령에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나인성 과부의 청년을 살리듯, 야이로 회당장 딸 12세 소녀를 살리듯, 주님은 이스라엘을 살리길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으로 마귀와 싸웠던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생과 이웃”에 대해 묻는다. 이 대목에서 “이웃의 본질”이 나온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사마리아 여행자가 불쌍히 여기고,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주막에 데려가서 숙박비도 계산하고, 다음날 떠나면서 일주일 여관비(데나리온 둘)를 계산하면서, 추가 비용은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오!! 이런 이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바로, 주님이다.
우리의 이웃은 평면적으로 옆집이다. 나는 옆집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아파트 문화, 빌라 문화는 옆집 사람과 단절이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옆집과 친했다. 고구마를 찌면, 옆집과 앞집과 뒷집에 나눠 먹는 맛이 있었다. 빌라에서는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어도 옆집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신경쓰고, 소음도 들리면 안된다. 우리의 이웃은 위층에 있다. 바로 ‘하늘’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사랑의 창조주, 그곳에 이웃이 있다. 이방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그곳으로 올라가신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치료하셨으니, 구원주는 주님 외에 누가 있으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이후, 초대교회는 급성장했다. 십자가 죽음 때문에 뭉친 것이 아니다. 십자가 죽음은 제자 공동체를 공포에 몰아 넣었고, 해체시켰다. 헤롯정권과 바리새파의 전략이 먹혔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니, 그들의 전략은 수포가 되었다. 세상은 ‘부활’을 고려하지 못한다. 주님을 믿는 성도는 ‘부활’을 소망한다.
AD36년 유대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초대교회가 신도수는 늘어났고, 헤롯정권은 아레타와 전쟁에 휩쌓였다. 아레타 왕국이 갈릴리를 급습했다. 또한, 사마리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면서 빌라도 정권과 대치했다. 초대교회 안에서는 공동체의 갈등문제가 불거지면서, 헬라파 과부와 유대파 과부가 ‘복지혜택’의 분쟁에 놓인다.
사도들은 교회운영에서 물러나면서 일곱집사를 세웠고, 그 중에서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했다. 그가 첫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때 사도 바울이 현장에 있었다. 순교자의 거룩한 피흘림이 사도 바울의 회심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울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요, 자신이 죽인 스데반이요, 박해한 기독교였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이웃인 기독교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았다.
비용을 지불한 사마리아 여행자는 구속(救贖)과 관련된다. 구속(救贖)은 구원(救援)과 속량(贖良)이다. 강도를 만난 자는 다쳤다. 사마리아 여행자는 그를 구원(救援)했다. 119 응급조치를 한 것이다. 제사장은 멀리서 보고 피해서 달아났고, 레위지파는 가까이 와서 확인하고 외면했다. 사마리아 여행자는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다. 아마도 밤샘 간호했을 것이다. ‘속량을 비유한’ 여관비용까지 지불한 착한 사마리아 여행자는 주님이시다. 그 사랑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