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장에는 형제들의 죄를 용서할 것, 나병환자 10명 치료, 말세현상이 나온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으니, 눈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했다. 그러면서,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임한 심판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가 언제 임한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 알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면, 우리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상관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때의 심판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 노아의 때에 임한 심판을 그들이 알았을까?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오직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들만 알았다.
롯의 때에 임한 불심판을 소돔성 시민들이 알았을까? 전혀 몰랐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탈출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에게 임했고, 갈대아 우르는 버려둠을 당했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을까? 전혀 모른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악인들은 그들의 악을 즐김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알지 못한다. 불의함을 ‘의로움’으로 믿고 살면, 의로움을 ‘불의함’으로 안다. 노아의 때, 롯의 때에 심판받은 자들은 심판받은 것을 모르고,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것을 안다. 이것이다. 성경적 진실이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 공동체다”라고 했으면, 그들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말해줘도 비웃음을 살 뿐이다. 산에서 배를 만든 노아는 배를 만드는 동안에 ‘조롱거리’가 되었고, 함과 셈과 야벳은 학교와 마을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만약, 함과 셈과 야벳이 아버지를 반대했다면 배를 타지 않고, 탕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배를 만드는 일에 함께 했다.
롯은 소돔성이 멸망할 것을 알았으나, 사위들은 ‘농담’으로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같다. 들을 귀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다. 탕자가 돌아오니,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서 잔치를 하고, 장자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아버지는 기쁘고, 장자는 걱정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 반응이 이렇게 다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령의 생각으로 살아야, 영혼의 평강이 바람처럼 불어온다.
롯은 소돔성이 멸망할 것만 알았지, 아브라함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세상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인 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존속하고 발전한다. 교회가 타락하면, 도시 문명은 금방 전쟁이 일어난다. 서로 관용으로 이해할 때, 도시공동체는 전쟁을 모면할 수 있다. 서로 싸우면, 서로 죽는다.
하루에 7번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면, 그것도 용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자, 사도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무익한 종” 비유를 꺼내신다. 혹을 떼러 갔다가 제자들은 혹을 붙이고 왔다. 무익한 종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고 말했다.
인생이 갖춰야할 ‘겸손과 낮은 마음’은 ‘무익한 종의 태도’로 잘 나타나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행하고, 항상 무익한 종으로 낮아져야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며, 선분으로 끝날 인생이 영생으로 연결되었으니, 이보다 좋은 축복이 어디에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