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무엇인가? 상징성이다. 상징은 ‘누가’ 사용하느냐로 달라진다. 탄핵사건이 발생했다. 판결문은 ‘하나’였다. 광화문은 잔치했고, 안국동은 통곡했다. 촛불부대와 태극기부대는 정반대로 반응했다. 언어에 대한 상징성이 달라서 그렇다. 내가 ‘나의 어머니’라고 말하면,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때 ‘나의 어머니’는 각자의 어머니이지, ‘장창훈의 어머니’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어머니’는 나만 알기 때문이다. ‘언어’의 상징성은 ‘암흑상자’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어는, 문장은, 문맥은 포장지를 잘 뜯어봐야한다. 간혹, 신앙서적에서 시대정치와 문화를 설명하면서, 작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넘어가는 성경해석을 하는 것을 읽을 때가 있다. 옛날에는 “감탄사”를 던졌으나, 요즘은 “물음표”를 남긴다. 작가를 넘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책은 작가의 고유 저작물이다.
저작권은 70년으로 끝나지만, 저작물속에 숨겨진 ‘의미와 뜻’은 작가에 의해 제한된다. 독자는 작가가 한정한 뜻을 넘어설 수 없다. 넘어서면, 더 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니며, 작품은 훼손된 것이다. 이단들의 성경해석은 그래서 ‘원본의 훼손’이다.
요한복음 1장 19절~34절은 한 묶음의 사건이다. 산헤드린에서 대표단을 뽑아 세례요한에게 보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 세례요한은 “NO”라고 대답했다. 어떤 종교단체는 이것을 놓고, 각각 해석한다. 과연 그럴까? 왜,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을까?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엘리야다”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단은 이것을 각각 뽑아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했는데, 세례요한은 그것을 부정했다고 설명한다. 말도 안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그때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공개했다. 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전에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공개했다. 세례요한의 대답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공관복음을 읽고,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인식이 된 사람들은 “엘리야”를 들을 때, 세례요한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주를 증거하는 엘리야’로서 세례요한을 생각한다. 이것이 언어의 상징성이다. 그런데, 산헤드린 대표단이 ‘엘리야’를 물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엘리야와 같을까? 문맥을 통해 보면, 그리스도와 ‘그 선지자’ 사이에 ‘엘리야’가 들어있다. 그 선지자는 ‘기다리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다. 결국, 같은 말을 3번 다르게 물어본 것이다.
엘리야같은 그리스도, 모세같은 그리스도를 그들은 기다렸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특히 엘리야같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도 아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요한복음 1:35~51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다. 초대교회는 떠들썩했을 것이다. 공관복음은 분명히 베드로가 먼저 전도되고, 그 다음이 요한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먼저다. 게다가, 출발점이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가장 먼저 따른 두 제자가 바로 사도 요한과 안드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전도했다.
마태는 나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빌립과 나다나엘이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먼저 읽었던 성도들에게 요한복음이 배포됐을 때,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한 혼란은 무엇을 목적하는가?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라는 것? 아니다. 예수님이 드러난다. 세례요한조차 등불에 불과한데, 하물며 제자들이랴!!
요한복음 1:19~23의 4가지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① 네가 누구냐?
② 네가 엘리야냐?
③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은 세례요한과 동일해야하는데, 어떠한가? NO 또는 YES?
④ 그렇다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오늘은 10월 1일, 요한복음 1장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