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경로로 좋은 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타고난 인복 덕분인지 하나같이 순하고 착한 친구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 친구들은 이따금 안부를 묻고 함께 밥을 먹곤 하는 꽤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향하는 나의 감정은 각별해졌고, 그 마음을 알았는지 각자가 품은 일상적 생각뿐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고민들까지 나에게 털어놓곤 했다.
우리의 주제는 다양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사회 초년생 또는 취업을 앞둔 학생들이었기에 진로, 사회생활, 학업 등에 대해 주로 얘기를 나누었고, 나에게도 꽤나 어려운 주제인 연애에 대해서도 종종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한 번쯤은 해봤던 고민들이기에 흩어져 있던 예전의 나에 대한 기억들을 되감기 해보며, 당시 내가 했던 경험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던 점들을 들려주게 되었다. 하나 둘 내게 연락해 오는 친구들이 늘어가고, 과거를 회상하는 횟수가 늘어가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의 이런 인간관계에 툭, ‘멘토-멘티’ 라는 단어를 붙여버렸다. 그리고 나는 돌연 불편해졌다.
흔히들 멘토를 생각할 때 ‘성공한’, ‘존경 받는’, ‘지적인’, ‘성숙한’ 등과 같은 거창한 형용사를 떠올리곤 한다. 멘토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맥락에서 당연히 난 아직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인격인지라 멘토도 그 유사한 무엇도 아니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멘토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멘토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딧세이가 전쟁에 출정하면서 아들을 친구 멘토르(Mentor)에게 맡기게 되었고, 멘토르는 그 후 10년 간 친구의 아들인 왕자를 위해 삶의 지혜를 나누고 곁에 있어 줌으로써 왕자의 성장을 도왔다는 일화에서 멘토라는 말이 생긴 것인데, 요즘은 그 의미가 미묘하게 바뀌고 부풀려진 듯한 감이 있다. 앞서 말했듯 요즘의 멘토는 뭔가 대단히 굉장한 사람인 것같고, 누군가의 인생에 함께 하며 지지하는 상호 친밀한 관계라기 보다는 멘티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다소 단절적이고 실리적인 관계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몇 년 전 멘토 열풍이 불었을 때,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유명인들이 자발적 또는 타의에 의해 멘토라는 타이틀을 달고 대학가나 방송가를 돌며 열띤 강연을 하던 기억이 난다. 대학 교양 과목이나 교내 활동에 다양한 이름의 멘토링 과정이 편성되었고, 유명한 멘토를 찾아 섬기는 것이 사회 생활을 앞둔 청년들에게는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스펙의 일부처럼 되었다. 그런데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멘토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힘들 때 찾아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구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을 거라 짐작된다. 또 그게 당연하고.
당연한 이유는, 그러한 이벤트성 만남으로는 비단 멘토-멘티 관계뿐 만 아니라 어떠한 인간관계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연에 참여하여 굉장히 감명 받은 멘토의 연락처나 이메일 주소를 어렵게 얻었을 수는 있다. 연락할 수도 있고, 친절한 멘토가 연락에 응해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나 유명한 멘토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며 하는 강연의 무수히 많은 청중 중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 선뜻 시간을 내는 수고를 반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기본적으로 멘토에게는 멘티를 도울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애정과 관심 없이는 의무로라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돕기 어려운 법이다.
또 그러한 멘토가 답을 해준다 한들 무슨 질문을 계속할 수 있을까? 멘토가 해 준 단 몇 시간의 잘 짜여진 이야기로 그 사람의 철학, 가치관, 성격적 특성 등을 모두 알 수 없고 피상적인 이미지의 낯선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낯선 사람과 나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 공감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해서, 나는 멘토라는 말로 맺는 무미건조한 관계에 목 매지 말았으면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존경 받는 멘토도 나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인생에서는 최선의 지도를 완성했을 지라도 내 인생 지도를 완성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진짜 필요한 사람은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유명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본 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고, 기꺼이 나의 길을 함께 해줄 수 있는 길동무. 친구이다.
멘토르가 10년 간 왕자의 곁에서 했던 역할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한 발 한 발 왕자가 내딛는 길을 응원해주고 헤매고 있을 때 함께 길을 찾아주는. 내가 후배들과 맺고 싶은 관계도 그런 것이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부모님 말고 인생에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친구일 수도 있고 선배, 상사, 예전 은사님일 수도 있다. 휴대폰에 연락처만 있는 유명인의 이름은 지금 지워도 괜찮다. 대신 나에게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멘토에게 전화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