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다. 과연, 이사야는 무엇을 위해 성전에 있었을까? 민족의 큰 어른이 죽었는데, 슬퍼했을까? 혹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정의라고 판단했을까? 웃시야는 말년에 하나님의 제사를 드린 불경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누구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열정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암살당하고,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도 탄핵의 총탄을 맞고 감옥에 갇혔다. 웃시야 왕이 죽듯 그러하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무엇을 깨닫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자신의 범죄를 깨달았다. 입술로 지은 그 죄를 참회하며,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그때 죽음에 처한 이사야에게 성령의 숯불이 내려와서, 죄가 사해지면서 죽음을 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건을 놓고,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가? 지금 이 시대는 또한 어떠한가? 각자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위치를 점검해야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곧 웃시야와 이사야의 관계가 끊어지고, 비로소 하나님과 이사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된다. 나는 옛날 종교를 떠나면서, 그 지도자가 내게서 죽었다. 나도 그에 대해 죽었다. 그 죽음이 내게 새로운 부활을 선물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탄생이며, 2천년전에 약속되어 상속된 성령의 유산이다. 유대인들이 경멸한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약속이 실현되었는데, 이단(異端)에 속한 자들에게도 동일한 성령의 약속이 주어진다.
“그곳을 떠나라”
이방인에게 주어진 성령의 약속은 ‘이방풍속’을 떠남으로 주어진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성령의 은혜속에 거할 때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단속에 계속 머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형식적으로만 안다면, 성령의 능력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단은 곧 이방으로 멀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요단강물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 지도자를 떠났다. 벗어났다. 세례를 받고 바로 유대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갈릴리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삭도 모리아산 번제사건을 드리고, 그때 아버지를 떠나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다. 야곱도 이삭의 축복을 받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을 떠나,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았다. 여호수아서 1장에 보면,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펼쳐진다. “모세가 죽고” 하나님이 드러난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듯,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신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죽음’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 드러났다. 하물며 인생이랴!! 돈과 권력과 풍요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돈과 권력과 풍요’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돈과 권력과 풍요’를 물리치면서 성령의 은혜가 임한다. ‘돈과 권력과 풍요’는 성령의 속성이 아니고, 세상의 속성이다. 세상이 죽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의 말세예언, 해달별의 추락이다.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가득히 드러났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사야도 하나님앞에 죄인으로 죽자, 하나님께서 숯불로 그 입술을 인치면서, 사명을 주었다. 자기가 절대로 믿는 지도자가 있는가? 그와 관계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드러날 것이다. 각자의 웃시야 왕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