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심판 이후, 바람이 불고 물이 줄어든 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억”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갑자기 비가 내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를 기억해서 그런 것이고, 비가 서서히 그친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해서 그렇다. 창세기 8:1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기억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조건을 세워도, 아무 필요가 없다. 기억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까지 닫혔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을 열고 닫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우울증’을 닫을 자는 하나님이고, 미래의 궁창에서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막을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한 창조주로서,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신다. 그 하나님을 믿어야 영혼이 영생한다.
“오!! 에덴동산이다!! 놀랍다!!”
어떤 건물을 세워놓고, 그것을 찬양하는 자들은 위의 문장을 말할 것이다. 그것!! 아무 필요없다.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는 하나님이시다. 가인이 했던 일이 바로 에녹성을 쌓고, “이것이 에덴동산이다”라고 했다. 건물을 세워놓고, 사람들은 “이것이 하늘의 성이다”라고 한다. 그것이 바벨탑이다. 도처에 에덴동산이 있고, 바벨탑이 있고, 새 예루살렘이 있다. 모두 가짜요, 허상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그 영혼이 어떠한지, 지금도 내려다보신다. 그 영혼과 그 단체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움이 없다면, 천하의 높은 산도 잠길 심판이 시작된다. ‘천하의 높은 산’은 곧 그 단체의 가장 높은 자를 뜻한다. 예수님 시대에는 빌라도와 헤롯왕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앞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다.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재판장이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입술로 그들을 심판한 것이다. 예수님이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 로마권력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차례로 날려 보냈다. 까마귀는 결코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쳤는데,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오지 않고, 오직 사마리아 문둥병자만 예수님께 왔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그 발앞에 경배했다. 까마귀는 감사할 줄 모르는 족속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입술은 성령의 비둘기가 임한 것과 같다. 입술에서 불만과 불평만 나오는가? 혹은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가 있는가?
땅이 말랐다. 그때 노아가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하니, 그때 노아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땅을 마르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 식사문화에서 아버지가 숟갈을 들 때, 자식도 숟갈을 든다. 신호는 아버지의 숟갈이다. 아버지의 숟갈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먼저 숟갈을 들게 되면, 불효자식이다. 노아가 방주를 나가지 않았는데, 먼저 나가는 자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불효자식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가라”는 말씀이 있자, 노아가 방주를 나갔다. 그 징조는 어디서 왔는가? 비둘기가 가져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나가도 된다”는 징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하나님께 최종적을 확인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600. 2. 3. 홍수심판 예고
600. 2. 10. 방주속으로
600. 2. 17. 홍수심판
600. 4. 27. 천하의 높은 산이 덮임
600. 7. 17. 아라랏 산에 방주가 멈춤
600. 10. 1. 봉우리가 보임
600. 11. 11. 까마귀를 날려보냄
600. 11. 17. 비둘기를 날려보냄
600. 11. 24. 비둘기를 2번째로 날려보냄 (감람나무)
600. 12. 1. 비둘기를 3번째로 날려보냄
600. 1. 1. 땅이 완전히 마름
600. 2 27. 방주에서 나옴.
<총 1년 24일의 방주사역이 마침>
* 물이 넘친 150일과 물이 빠진 150일은 같은 5개월로서 ‘넘쳤다가 빠지는 기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