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문’을 뜻하는 바벨! 노아의 후손이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았다. 선견지명으로 바벨탑을 쌓아서 홍수심판을 막겠다는 것인데, 그 중심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홍수심판을 ‘신의 심판’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재해로 받아드린 것이다. 배를 만든 ‘역청’의 건축기술이 벽돌과 융합해서 바벨탑이 하늘로 솟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고 내려오셨다. 바벨탑도 직접 내려와서 확인했다.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천사들도 함께 내려온다. 그래서 “우리가”로 표현된다.
바벨탑을 쌓은 목적은 3가지다. ① 홍수심판 방비 ② 흩어짐 방지 ③ 이름 높이기였다. 바벨탑을 쌓고 국가를 건설하려고 사람들이 몰렸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다. 대형교회는 바벨탑으로 흐를 위험이 매우 높다. 사람이 몰리면, 계급이 생기고, 이름이 높아진다.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스며드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구멍이 크면, 물고기가 빠져나간다. 이단교회도 마찬가지다.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종교마다 짐승의 권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뱀은 ‘권력의 둥지’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얼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하셨다. 언어가 혼잡해지면, 서로 흩어진다. 시날 평지에서 그들은 서로 말하면서 언어가 통했다. 언어가 통하는 것이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 독일제국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나찌즘’의 선민사상이 들어가니,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인류의 재앙을 초래했다. 어떤 이단종교는 “히틀러는 예수님의 원수를 갚았고, 성경이 이뤄졌다”라고 해석한다. 오!! 어찌!!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유대민족 출신의 예수님인 것을 기억할지라!!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사셨다.
사람과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언어’ 문제다. 많은 말을 하는데, 대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공감소통’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 공감소통은 말보다 경청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가 말하게 하는 사람이다. 말의 기본화법은 2~3분 말하고, 말의 주권을 상대에게 넘기는 것이다. 사람들과 말할 때, 주로 말하는 사람은 1/10로 말을 줄여야한다. 1사람이 오랫동안 말하면, 나머지는 말을 못한다. 시간의 피자는 골고루 배분되어야 공평하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말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자세히 관찰한다. 어떤 사람이 말을 길게 말하면서, 말을 끊지 못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을 하면서 상대에게 말을 패스하는가? 어떤 사람이 질문을 활용해서 상대가 말하게 하는가? 질문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답을 요구하는 질문, 말하게 하는 질문이다. 상대가 말하게 하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다. 화법책으로 ‘삶과 화법’(박이정 출판사)를 추천한다. 서로 대화가 안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 말하려는 바벨탑’ 때문이다. 대화는 ‘서로 들으려는 존중’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화법의 제1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