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영웅, 백전노장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말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받아드렸다. 마침표를 찍어야할 시점,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있었다. 정복과 분배다.
모세가 죽고, 그 바톤이 여호수아에게 넘어왔는데, 여호수아도 결국 죽음을 직면했다. 인생이 이와 같다. 여호수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홍해의 기적을 떠올렸을까? 40년 신광야 생활이 스쳤을까? 요단강을 건너 최초로 무너진 여리고성을 떠올렸을까?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스승이요, 동역자요, 믿음의 초석이었다.
여호수아는 요단 저편에서 숨진 ‘모세’를 떠올렸다. 그렇다. 모세는 요단 저편, 진정한 가나안에 들어갔고, 여호수아도 정복전쟁을 마치고, 이스라엘에게 상속분배를 마친 후에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할 것이다. 요단동편에 있든, 요단서편에 있든, 결국 인생의 땅을 떠나야할 그때, 본향으로 가야한다. 본향은 눈 감으면 건너편에 있다.
여호수아는 분명하게 ‘모세가 물려준 그 땅’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광활한 영역이요, 각각 르우벤과 므낫세와 갓지파에게 주어졌다. 레아의 장자, 라헬의 장자, 몸종의 아들들의 장자에게 요단 동편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요단 서편의 땅도 균등하게 분배했다. 정복과 분배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야 공평하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복을 달성했지만, 모세의 업적과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예수님은 신약을 펼치시면서, 구약정경을 통해 그 뜻을 이루셨고, 모세의 불뱀사건을 통해,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유월절 절기와 율법의 제사를 통해 ‘십자가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유대교를 버리지 않았다. 유대교는 요단 저편 율법이요, 기독교는 요단 이편 은혜다.
이단종교는 숫자가 급증하면, 그것을 증거삼아 “하나님의 뜻이 당세에 이뤄졌다”면서 예수님의 이름과 공적을 지우려고 한다. 그러면 안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인류의 죄사함을 이루신 ‘구원의 창조’였다. 예수님 없이 기독교도 없고, 그 이단종교도 나오지 못한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피흘림 없이 죄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인생을 살아보니,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떠날 채비를 해야함을 알게 된다. 그렇다. 인생은 이 땅을 떠나야한다. 그 어떤 종교적 영웅도, 정치적 영웅도, 이 땅을 떠나면서 자신의 영혼을 창조주 앞에 맡겨야한다. 그때, 십자가의 피흘림 없이, 어찌 창조주앞에 서리요. 자신의 공적으로는 아담과 하와가 가린 ‘무화과 잎새’ 밖에는 안된다.
여호수아가 31명의 왕을 정복하고 죽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앞에 무슨 공적이겠는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한 그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전해졌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그것이 큰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은 그 십자가의 말씀을 전해 들었다. 십자가를 버리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십자가는 이 땅을 살면서도, 이 땅을 떠나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모세는 2명의 왕을 물리쳤고, 여호수아는 31명의 왕을 물리쳤으니, 여호수아가 더욱 대단한다는 식의 비교논리는 어리석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왔다. “죄”를 정복한 구원의 창조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