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신약의 선악과다. 그것을 따먹지 말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상속한 예수님도 산 자의 예수님이다. 살아있어야, 예수님의 숨결인 성령을 느낄 수 있다. 죽은 자는 핸드폰을 받지 못한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모든 것을 상속할 뿐이다.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한다. 주님께 살아있으면, 주님을 상속(相續)받는다. 상속은 ‘연결과 이어짐’이다.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산 자가 되어야한다. 갈대아 우르에 대해 ‘떠남’으로 죽은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대해 살아났다. 저주의 십자가는 세상적 죄에 대함이요, 영광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함이다. 세상으로 죽지 않고 어찌 하나님으로 살아나리요.
사데교회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님의 평가다. 사회적으로 살아있으나, 육체적으로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사데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말씀했다. 그들이 “기독교인”의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다는 것이다. “섭리사”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하나님이 떠난 종교단체는 ‘단체’로 전락한다. 해달별이 추락하듯, 결국 죽음이 도래할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명심하라!!
◆ 십자가는 신약의 선악과
“우리는 심정의 십자가를 진다”
내가 떠났던 곳의 교리다. 내가 어떤 성도에게 물었다. “그 십자가는 무엇이냐?” “너는 그것을 졌느냐?” “그 흔적이 도대체 뭐냐?” 그 성도는 말하길, “마음이 아픈 그런 것이지, 죽지 않고, 속이 상하는 그런 십자가?” 그녀는 말하면서도, 그 의미를 전혀 몰랐다. 심정의 십자가는 없다. 십자가는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다. 심정의 십자가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처럼 악용되기에 딱 알맞은 ‘모호한’ 교리다. 속지말라!!
십자가는 신약동산에 설치된 ‘금지된 선악과’다.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랐다. 결코, 금지된 십자가를 버리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명령을 범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취함으로 명령을 어겼다. 주님은 ‘십자가의 도’를 지켰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금지명령’으로, ‘죽음’이다. 에덴동산은 “따먹으면 죽는다”였고, 신약동산은 “십자가를 지면 죽는다. 죽으면 그때 살아난다”이다. 십자가는 세상으로 죽고, 하나님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내가 떠난 그곳은 ‘십자가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종교가 되고 말았다. 십자가는 ‘마귀의 폭탄’에 설치된 안전장치다. 그것이 설치되어야, 마귀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 그것이 제거되면, 마귀가 출몰한다. 십자가는 마귀를 ‘흑암’에 가둔 자물쇠다. 그것을 제거하면, 마귀가 다시 나오게 된다. 신약동산에 있는 십자가의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여!! 돌이킬지어다!!
왜, 그렇게 그곳은 성적 타락이 많고, 도덕적 불륜도 많고, 짐승의 권력이 드글거리는 밀림일까? 풍요가 넘치는 아합정권 시절, 엘리야가 나타나 가뭄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면, 영적 기갈이 찾아온다. 그들에게는 영적 기갈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심령의 곤고함을 잊기 위해서 넘치는 풍요로 가릴지라도, 그것은 아담의 나뭇잎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가 주는 흰 옷을 입지 않으면, 영적 노예에서 해방될 수 없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자마다 죄가 침입해서, 죄의 쇠사슬에 묶여 마귀의 통치를 받는다.
그곳을 떠난지, 1년이다. 1년동안 두려움과 공포의 홍해를 건넜다. 해달별이 추락하듯, 내 삶이 곤두박질쳤다. 그들이 내게 묻길, “창훈이 너가 어찌 섭리를 떠나느냐?”라고 하지만, 나는 그곳을 떠남으로 비로소 십자가의 진리를 발견하고, 선악과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선악과의 축복을 받았다. 십자가를 버림으로 ‘신약의 선악과’를 따먹은 ‘이단의 죄’를 나는 회개했다.
인생은 날마다 선악과 앞에 놓여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인가? 속도보다 방향이 우선이다. 주님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아담의 이름은 가졌으나, 살아있는가!!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묻고 있다.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
산 자들이여!! 죽은 곳을 떠날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