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3편] 예술은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 사진 기술이 발달했을 때, 예술가들은 사진을 ‘기술’로 취급했다. 사진은 빛이 그리는 예술인데, 너무 사실적이며, 누가 찍어도 동일해서 ‘기술’로 취급받았다. ‘사진의 완벽한 재현’으로 화가는 사라질 직업으로 예견됐다. 그러나,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인터넷이 발달하면 종이책과 종이신문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지만,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듯 그렇다. 그림은 상징의 날개를 달고, 사람들의 영혼을 자극하는 새로운 예술로 승화됐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림은 있는 사물을 상징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상징은 화가의 해석이다. 사진은 있는 사물에 다른 사물을 첨가하면 ‘조작’의 오명을 받는다. 그림은 다른 것을 첨가해도, “상징의 예술”로서 예찬받는다. 사진은 그림의 밑부분을 담당하고, 그림은 사진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가 더 넓은 자유를 누렸다. 이것을 정신적 현실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한다.
회화는 ‘손의 붓’이 그려내는 상상의 창조물이다. 화가는 붓으로, 작가는 펜으로 창조주의 권능을 갖는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했다. 피조물로서 창조의 DNA를 물려받은 피조물은 사람이 유일하다. 그것이 창조적 상상력이며, 자유의지다. 화가는 인간의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을 보면서, 화가의 느낌으로 해석해서 그림을 그린다. 이것이 상징이다. 보여지는 것을 추출해서 새롭게 그리는 것이다. 그림은 손의 예술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진은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적이다. 사진가는 구도를 통해 무엇을 찍을지를 결정하거나, 빛의 감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사물의 형태를 바꿀 수는 없다. 누드화를 찍기 위해서는 여자가 옷을 벗어야한다. 반면, 화가는 여자가 옷을 벗지 않아도 벗은 상태를 그릴 수 있고, 웃는 모습을 우는 얼굴로 바꿀 수도 있다. 여인이 웃고 있지만, 화가가 볼 때 ‘우는 여인’을 통해 ‘미래의 기쁨’이 느껴졌다면, ‘웃는 얼굴’로 그려낼 수도 있다. 웃음과 슬픔도 주관적인 가치다. 이것이 창조적 상상력이며, 감정의 자유영역이다. 그러므로, 예술과 기술은 ‘창조성’을 놓고 상호대립한다.
1872년 줄리아 캐머런은 ‘기다림’의 사진예술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성모자’ 그림에 나오는 아기 천사를 모방한 사진이다. 여자 아이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천사의 날개를 어깨에 붙여서 연출한 사진이다. 그런데, 아기 천사와 캐머런의 여자 천사는 표정이 전혀 다르고, 날개도 독특하다. 이것이 모방을 통한 창조다. 캐머런은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기존 그림속에 집어 넣어서 새로운 사진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창조성이 부여되면, 저작권이 인정된다. 1513년 아기 천사 작품이 360년이 지난 후 1872년에 캐머런의 천사로 새롭게 부활한다. 만약, 캐머런이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천사의 표정이나 날개를 새롭게 하지 않고 똑같이 모방했다면, 비평가들은 그것을 “독창성이 결여된 사진의 치부”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예술은 독창성이며, 창의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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