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인의 정체성은 ‘레위’로 정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위는 ‘디아스포라’다. 야곱이 르우벤과 레위에 대해 ‘함의 저주’처럼 강력한 예언의 못을 박았다. 레위는 “나누며 흩어짐”으로 운명지어졌다. 야곱이 선지자로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나눔과 흩어짐 때문에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다. 땅이 없는 그 상실의 축복에 하나님이 임재한다. 성전업무는 레위지파 고유권한이며, 세습됐다.
함은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 그런데, 함의 자손들은 ‘가나안’을 상속받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겼다면 아브라함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에게 상속한 ‘가나안 땅’을 훗날 아브라함에게 넘겨줬다. 저주를 받는 것이 축복이 됨을 알 수 있다. 사라의 저주를 받고 버려짐을 당한 하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핍박과 저주의 버려짐은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야곱도 형의 살해위협을 받고 도망쳤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다리를 보았고, 밧단아람에서 ‘사업과 사랑’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버려짐과 흩어짐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다.
‘레위지파’의 사명은 종교적 업무로서, 지파와 지파를 하나로 연결하는 힘줄의 기능이다. religion이라고 한다. “끈으로 다시 묶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끈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묶었다. 이것이 회복의 역사다. 구원이며, 죄사함이다.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고, 땅을 받지 못한 레위지파에게는 하나님의 성막을 상속해서, 예배자로서 전국으로 흩으셨다.
레위지파는 흙으로 빚은 사람속에 생기를 불어넣은 성령의 역할이다.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은 흙으로 빚은 사람이요, 그 속에 흩어진 레위지파는 성령의 숨결이다. 이것이 상실의 축복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모두 동격이다. 흩어지고, 나뉜 자의 고유사명은 섬김이다. 예배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섬겼다. 훗날 제사장의 사명이 강해지고, 경제적 이권과 결합되면서 변질되었을 뿐, 본래 사명은 성령의 소명이다. 레위지파만 하나님을 상속받았고, 땅을 상속받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자신들의 소명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예수님은 로마제국을 포함해서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했다. 로마제국도 이스라엘의 원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고귀한 생명들이다. 그들을 누가 구원할까? 훗날, 12사도를 포함해서 초대교회를 이방에 세우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면서 성령이 임하고, 사도 바울이 전도되면서, 결국 로마에도 교회공동체를 세웠다. 교회를 세운 것은 하나님과 그 도시를 잇는 것이다.
교회는 곧 천국의 대사관이다. 캐나다는 이민정책이 발달해서, 이민을 가기전에 미리 교육을 받는다. 천국도시에 이민을 가기 위해서는 미리 이 땅에서 교육을 받고 천국시민권을 받고 살아가야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자격이다. 죽음 이후에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대사관을 통해서 천국시민의 삶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다. 대사관은 본국의 영토이며, 본국의 통치권이 미치듯, 이 땅의 권세가 교회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역청이 발라졌다면 그렇다.
미국에 이민을 가려는 사람은 미국법과 그 정책에 보다 관심이 있지, 한국에는 관심이 줄어든다. 그처럼 천국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천국의 문화와 정책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천국은 곧 성령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삶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 성령이 임한 자는 걸어가는 모든 곳이 대사관이다. 천국은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삶이다. 그래서,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다. 영생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육체는 껍질일 뿐이다. 살아서 주님을 믿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께서 넉넉히 죄의 권세를 물리치신다. 주님은 땅과 하늘의 대제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