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기억속에 내재된 경험과 지식을 꺼내서 가만히 분석해본다. 내 주요업무다. 신문도 가끔 사지만, 읽을 틈이 없다. 몇몇 취재현장을 가거나, 글쓰는 일에 몰입한다. 나는 룻처럼 ‘칼럼의 이삭줍기’에 재미를 붙였다. 오랫동안 해보니, 유익이 쏠쏠했다.
오늘은 “모든 죄가 용서됐다”는 과거교회의 선언이 생각났다. 옛날 교회는 율법적 교리가 강했다. ‘죄와 의’는 명확했다. 죄를 지으면 죄요, 의를 행하면 의다. 통과식으로 불리는 수료식을 마치면, 수료증처럼 ‘죄의 사함’이 자동적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단상에서 “모두 죄인이다”는 선포가 떨어졌다. 이후, 성도들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회개편지를 쓰고, 용서의 편지를 받은 자들은 하늘로 날 듯 기뻐했고, 편지를 못받으면 침울했다. 데살로니가서에 나오는 ‘휴거말씀’이 선포됐고, “그날에 하늘나라 혼인잔치에 참여하면, 죄를 지어도 그 영혼의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선포됐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완벽하고, 그 종교단체를 떠날지라도, 어떤 죄를 범할지라도 영혼구원은 안전하다”는 말씀이 선포됐다.
성도들은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환호성을 던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떠났다. 영혼은 구원받았으니, 육체는 죄를 즐기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이단교리의 한계다. 몇 달 뒤, 교리가 수정됐다. “휴거가 됐어도, 죄를 지으면 휴거가 박탈된다”라고. 성도들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도대체, 왜 그런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성경적 진리는 ‘오락가락’하지 않는다. 사도들을 통해 선포된 예수님과 바울을 통해 선포된 예수님이 동일하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진리는 일맥상통한다. 예수님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선포했다. 그것이 십자가 구원이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은 없다. 이단교회가 아무리 잘되고, 회개편지의 답장을 수백통 받았어도,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뤄진다. 죄를 없애는 유일한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는 곧 사망이니, 사망으로 죄를 이기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래서, 사망을 이기신 주님으로 선포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긴 적이 없다.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그 진리는 변함이 없다. 이단교리는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들쑥날쑥하지만, 진리는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