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율법적 의와 은혜의 의,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다. “의롭다”고 할 때, 그것도 2가지다.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겨지고, 은혜로 ‘의롭다’ 여겨진다. 부자청년은 “의인”이었다. 율법을 완전히 행했으니, 의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의하다”고 판결했다. 율법적 의로움이 하나님께는 ‘불의함’으로 나타난다. “자기 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의롭다”는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불의하다”는 전제가 있어야한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죄인은 “하나님께 죄인”이다. 하나님을 향해 “죄인됨”을 깨닫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그런데, 율법을 맡은 자들이 자신들이 “죄인됨”을 알면서도, “의인됨”으로 착각했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죄인”으로 드러난다. 율법 자체가 “죄인”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 때, 2가지 반응이 일어난다. 바로의 완악함, 그리고 이스라엘의 순종이다. 율법은 바로를 완악하게 하듯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낸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매년, 날마다, 번제를 드려야한다. 죄를 짓고, 마음에서 죄의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율법의 한계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니, 그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꺼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면성이다.
가령,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유대인들은 “모세의 지팡이”를 의지한다. 그들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고, 그것으로 홍해가 갈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의 지팡이를 행하면, 구원이 열린다고 믿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들어라”고 해서 모세가 들었다고 증언하고, 밤새도록 동풍이 불게 해서 바닷물이 마르게 했다는 성경기록도 있다. 모세의 지팡이는 ‘상징적 표시’이지, 실제적 효력은 없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기 전부터 이미 동풍이 불고 있었고, 지팡이를 들지 않아도 홍해는 갈라진다. 하나님은 지팡이 때문에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홍해를 갈랐다. 이것을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되려는 자들은 “인간의 행동”에 의지한 자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행동”을 의지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행동”을 믿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뤄진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근원적인 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발적 탈출’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극적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행했고, 하나님께서 믿었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서,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신광야로 떠밀려 간 것이다. 바닷물이 갈라지듯,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신광야로 불려서 날아갔다. 하나님의 행함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율법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다. “입술로 암기하듯 고백하는 것”는 율법적 의에 해당한다. “주로 시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인(是認)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의 영역이다. 마음으로 믿으면, 그 믿음이 입술로 고백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했는데, 무엇을 믿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행동이며, 구원이다. 그것을 진정 믿으면, 마음속에 성령이 임한다. 의(義)는 하나님을 통해서다. 자기가 세운 의(義)는 가짜 돈이다. 하나님의 의(義)가 사용가능한 화폐다. 의(義)는 하나님의 어음이며, 자기가 만든 의(義)는 위조 지폐다. 세상과 율법에서 말하는 도덕적 의(義)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잠시 유효할 뿐, 하나님 앞에는 ‘장애물’이다.
율법과 도덕을 통해 쌓는 의(義)는 A4를 16등분해서 작은 종이에 “100만원”이라고 쓴 것과 같다. 또는, 칼라 프린트로 실제 돈을 인쇄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똑같이 프린트해도, 그것은 위조지폐다. 범죄다. 율법적 의는 ‘죄’를 낳을 뿐이다. 하나님의 의(義)만 ‘믿음의 의’요, 천국에서 사용가능한 ‘의’다. 구원은 사람의 의(義)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의(義)로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