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어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오!!! 창조의 신비여!!! 날마다 반복되는 수면(睡眠)과 기침(起枕)에서 나는 ‘부활’을 상상한다. 나는 어제와 동일한 까페에서, 동일한 성경을, 동일한 자리에서, 동일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글을 쓴다. 오!! 성령의 바람이여!! 똑같은 일상인데, 날마다 왜 신선하고, 설레일까? 이 또한 창조의 신비로움이다.
번역작가로 활동하는 A씨가 내게 글쓰는 문을 ‘활짝’ 열어줬다. 장발장 책이다. 그녀가 그 책을 번역했다. 내가 물었다. “영어원문을 어떻게 번역했어요? 우와!!” 그때, 그녀가 내게 귀뜸했다. “나, 영어 못해요.”라고. 영어를 못해도, 영어원문을 번역하는 그녀의 솜씨는 한글실력이다. 또 다른 장발장 소설책 4권을 펼쳐서, 그것을 엮으면, 새로운 번역물이 탄생한다. 이것이 ‘자료의 인용’이다. 밀가루는 재료요, 누룩은 창조성이요, 여인은 작가다.
내년, 나의 일상은 올해와 비슷할 것이다. 비슷하길 염원한다. 2019년은 내게 행복했고, 즐거웠고, 파도치는 물결의 흥분이 넘쳤으니, 내년도 나는 성경의 배를 타고 살아가리라. 성경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날마다 성경을 조금씩 읽으면서, 전체를 집대성한다. 하루에 10개의 칼럼을 쓴다면, 1년이면 3650개의 칼럼이 작성된다. 2019년에는 2000개 정도 칼럼을 썼다. 하루에 5개 정도 작성한 것 같다. 내년에는 속도를 분발해야지!! 칼럼 3650개는 종이책으로 70권 분량이다.
누가 내게 물었다. “하루에 어떻게 글을 그렇게 많이 써요?”라고. “먹으면, 싼다.” 그것이 질량보존법칙이다. 밥을 먹으면, 소화되고, 나머지는 배출한다. 지식을 습득하면, 마음에서 섭취하고 다시 내놓는다. 이것이 ‘인용의 법칙’이다. 인용할 때, 저작권을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독창성의 누룩’을 넣어야한다. 나는 계시록 3:9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그와 관련된 책을 몇권 꺼내서 읽고, 밑줄을 치고,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한 다음에, “그 말이 내 말이 되었을 때”, 글을 쓴다. 책의 말이 나의 말이 되었을 때,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것과 같다.
1999년, 신대철 교수님을 찾아갔다. 아니다. 그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하나님께 “시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기도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국민대 국문과 교수님인 신대철 교수님이 나를 애타게 찾았다. 그분에게 몇편의 시를 써서 보내드렸는데,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래서 나를 찾은 것이다.
“똑똑똑” 문을 두드렸더니, 신대철 교수님은 내게 “시를 계속 써봐요”라고 하시면서, “시를 쓰고, 그 시에서 1줄의 문장만 남기고, 모두 지워요, 1줄에서 새롭게 시작해요.”라고 알려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익혔던 글쓰기 방법이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1년 동안, 나는 시를 썼다가, 1줄을 남기고, 다시 썼다가, 1줄을 남기고, 그것만 반복했다. 그 방법으로, 나는 책을 읽으면서 “1줄의 문장”이 내게 ‘레마’로 다가오면, 그것으로 글을 쓴다.
계시록 3:9 “자칭 유대인”은 엄청난 선언문이다. 왜냐면, 그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그들은 유대인이다. 아브라함의 족보로 구성된 유대민족이다. 그들을 향해, 사도 요한은 “자칭 유대인”으로 정의했다. 유대민족은 ‘자칭 유대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부르지 않는다.
[요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이 된 것은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공의로운 거울’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자신들의 판결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이 될 수 없다. 예수님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주, 그리스도인데, 그를 믿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그 누구도 ‘구원주 메시야’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함으로, 우리도 주님안에서 세상에 대해 ‘작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롬9:6~8]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유대인은 보이는 피(혈연)를 의지해서 ‘자칭 유대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피(약속)를 의지함으로 ‘상속의 유대인’이 되었다. 누가 유대인인가? 누가 아브라함의 씨인가? 피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신앙’을 하는 자들이 그 약속을 상속받는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이스라엘 족속이 되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축복이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다. 상속권이 교회에 있어서 그렇다.
“자칭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발앞에 엎드린다”는 약속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이방민족들이 유대인들의 발앞에 엎드릴 것이다”고 예언했는데, 그 이방민족들에 ‘유대인’도 포함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새로운 유대인’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린다. 이사야 60:14에는 “너희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아래 엎드려”라고 했다. “모든 민족이 유대인에게 와서 겸손하게 시중을 들 것”으로 유대인들은 믿었다. 그 약속이 교회로 상속됐다.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계승했는가? 예수님과 같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는가? 날마다 그것을 확인해야한다. 상속권은 ‘믿음과 성령’으로 날마다 성취되기 때문이다.
** 칼럼은 ‘벽돌’이다. 칼럼 100개는 벽돌 100개다. 벽돌 100개를 쌓아서 집을 짓듯, 칼럼 100개로 책을 만든다. 칼럼 50개는 단행본 1권이다. 벽돌은 집을 1채만 지을 수 있다. 반면, 칼럼의 벽돌은 무한대로 사용 가능하다. 칼럼 100개는 수학적으로 책 2권이지만, 사실상 책이 5권 정도 나올 수 있고, 칼럼 1000개가 모이면, 책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칼럼’의 제목이다. 칼럼의 제목을 잘 정해야만, 칼럼의 활용도가 높아진다. 칼럼 제목은 ‘몇개의 핵심 카워드’로 정하는 것이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