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이 붙잡히고, 예수님은 갈릴리 고향에 갔다가, 주소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겼다. 그때, 예수님은 비로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세례요한과 같다”라고 말한다. 잘 몰라서 그렇다. 문맥으로 보면, 3:1에서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고, 3:17에서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다.
동일한 문장이지만, 완벽히 다르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다르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고, 예수님은 그 주인공으로서 직접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다.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는 자마다 천국복음을 준비할 것이고, 예수님의 외침을 듣는 자마다 천국복음을 영접할 것이다. 둘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세례를 받아야한다.
세례요한은 분명히 3:11에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증거했다. 그렇다면, 본인도 예수님께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성령과 불세례를 받지 않았다. 이것이 다르다. 외치고, 그 말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3:14에서도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했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다. 구약적 성령충만으로 살았을 뿐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받아드렸다면,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배움의 자세”는 그래서 중요하다. 가르침의 근원은 “배움”에 있다.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다. 낮아지라!! 겸손하라!! 배움에 익숙하라!! 무지를 인정하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도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야고보와 요한이 더 큰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까지 버렸으니…… 곧, 복음을 직장으로 삼았다. 실업자가 될지라도 말씀의 전령사가 되려고, 안드레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 4명의 위대한 결단이 가버나움에서 출발해서, 유대민족과 로마제국까지 대혁명을 일으켰다. 천국의 씨앗으로 오신 예수님이 ‘젊은 청년 4명의 어부협동조합’에 떨어져서 결실하니, 전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천국복음의 위력은 이와 같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 4명의 직장동업관계가 ‘복음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