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는 마태복음 10장을 읽고, 암송했다. “참새 한 마리 보다 귀하다”인 줄 알았으나,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였다. 아멘!! 우리는 전선줄에 앉아있는 많은 참새떼보다 귀한 자들이다.
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릴까? 이 참새의 용도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참새는 조금 더 저렴하다. 참새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다. 1+1 하듯이, 참새 한 마리를 더 준 것 같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를 살 것인지, 두 앗사리온에 참새 다섯 마리를 살 것인지,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마태복음 10장은 레위기 12장과 연결되며, 아사셀 양과 비슷하다. 참새는 사실상 ‘비둘기 새끼’의 대체용이다. 비둘기 새끼와 비슷해서, 참새가 제물을 대신했고, 사회에서 격리당한 문둥병자들을 위한 제물로서 참새 두 마리가 필요했다. 한 마리는 문둥병자를 위해 죽이고, 다른 한 마리는 문둥병자의 죄를 담당해서 들판에서 놓아 날아갔다. 새가 죄를 가지고 날아갔으니, 문둥병자의 죄는 없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문둥병자는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모두 깍고, 옷도 빨고, 제사장에게 마지막으로 확인 받은 후에 사회로 복귀했다.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죽이고, 나머지 한 마리를 광야로 데려가서 풀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죽음 염소의 피로 죄를 대속하고, 광야에서 놓인 염소가 죄를 지고 떠남으로써 죄가 잊혀지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고서 성령에 이끌려서 유대광야로 내몰렸다. 그것이 아사셀 염소로서 ‘어린양’을 상징한다. 백성의 죄를 담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유대광야에서 마귀를 물리쳤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흘림으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의 상징인 ‘아사셀 염소’에서 ‘제단의 염소’로서 그 뜻을 성취하신 것이다. 아사셀 염소로서 죄를 짊어질 때는 세례요한이 제사장 역할을 했고, 제단의 염소로서 죄를 짊어질 때는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직접 자신의 몸을 ‘어린양’으로서 거룩하게 피흘림의 제사를 드리셨다. 이것으로 대속의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언젠가, 내가 교회를 가는데, 길가에 참새 한 마리가 떨어져 죽어 있었다.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떨어져 죽었는가?”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때, 다른 참새 한 마리가 내 옆으로 날아갔다. “저 참새는 또 무엇인가?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날아갔네”라고 내가 생각했다. 참새 두 마리는 곧 나를 상징하며, 한 마리는 죽었으니 나의 죄를 대속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 죄를 가지고 하늘로 날아갔으니, 하나님께서 내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모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완벽한 약속이다.
주님은 아사셀 어린양으로서, 제단의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하셨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므로, 주안에서 선한 행실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지니라!!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될지니라!!
아버지에게 이끌려 모리아산으로 내몰렸던 이삭은 번제나무에 묶여서 죽었고, 믿음으로 살아났다. 그때 숫양이 이삭을 대신했다. 이제 모리아산을 내려올 때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내려오지 않는다. 올라갈 때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내려올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사셀 어린양에서 제단의 어린양으로 대속의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의 상속자가 되셨다. 그와같이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면, 주님과 함께 우주의 공동상속자로 등기된다. 공동상속자의 등기가 곧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다.
** 참고도서 (열린다 성경 : 성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