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3“15~16]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3:19~20]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옛날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가 정치적 사건, 법률적 판결로 보였으나, 이제 내게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들린다. 영어의 경지에 도달하면, 어느날 영어가 영어로 들리듯이, 말씀이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이 복되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는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으니”로 이어진다.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는데, 관리들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생명의 주를 죽였고, 또한 “생명의 주”를 죽였은지도 모른다. “죽어서 마땅한 자가 죽었다”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 하나님은 “죽으심을 당한 주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십자가의 도(道)는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도(道)와 같다. 바로왕이 고집이 셌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께서 바로왕을 강퍅하게 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서, 이집트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게 하시려고, 바로왕을 강퍅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그저 좋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기 9:16에서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너”는 바로왕이다. 바울도 같은 것을 증언한다. 로마서 9:17에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는 사람의 피를 대신했다. 그와같이 생명의 주가 죽임을 당했을 때, 그 “생명”은 피흘림으로 이 땅에 남겨졌다. 생명의 주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계시던 그 생명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고백하는 자마다 “예수의 생명”이 임하고, 예수의 이름을 시인하며, 구원을 받게 된다. 아멘!!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형판결에 대한 복권운동을 하지 않았다. 생명의 주를 죽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증언하면서, 그를 믿는 자마다 ‘생명’이 온다고 가르쳤다.)
또한 베드로는 사도행전 3:20에서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말씀을 선포했다. “예수를 보내셨다”의 과거형이 아니다. 확실히 미래형 종결어미다.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인데, 곧 예수다. 여기서 “예수”는 그 나사렛 예수다. 아멘!! 다시 오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생명의 주로서, 대속제물로서 기꺼이 자원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사랑의 주님이다.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히브리서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다. 베드로가 증거한 “다시 오실 예수님”은 “이미 오셨던 예수님”이고, “오순절에 오신 그 보혜사 성령님”이며, “장차 오실 심판의 예수님”이다. 모두 동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