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드라마 보기”가 되면서, 성경도 새롭게 보이고, 드라마도 보인다. 웬지, 자꾸, 설렌다. 이건 뭐지? 하지원을 보면, 그 여인때문이 아니고, 그 여인의 상징성으로 설렌다. 반죽하는 그 모습에서 ‘밀가루로 반죽하는 성령님’이 연상되면서, 뭉클했다. 이미지가 그렇게 그려지면서 초콜릿 드라마는 내게 ‘성경 드라마’다.
이강과 이준, 둘은 배다른 남자다. 마치 리브가에게 쌍둥이 두 아들과 같고, 하나님께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을 모두 사랑하신다. 자애로운 아버지는 장남과 차남을 모두 사랑하고, 효자와 불효자를 모두 사랑한다. 문차영은 요리사!! 사랑하는 이강을 위해서도, 이준을 위해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준다. 어느날, 사고를 당해서 미각과 후각을 잃고서, 음식맛을 모르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상대가 맛있게 먹는 그 맛으로 살아간다.
마음이 아픈 이준이 자꾸, 문차영이 생각나니, 카톡으로 “밥맛이 없을 때는 무슨 음식을 먹죠?”라고 물으니, 문차영은 “마음이 아플 때는 김치볶음밥이 최고죠”라고 답신을 보낸다. 이것은 그냥 멘트가 아니고, 경험에서 나오는 메뉴다. 야곱의 입맛은 리브가가 제일 잘 안다. 그처럼, 창조주는 우리 영혼의 입맛을 알고서, 심령이 상했을 때, 구원의 음식을 직접 차려주신다. 매일 성경묵상하라는 것은 매일 맛있는 밥을 차려주시겠다는 약속이지, 그것을 암송하라는 율법의 계명이 아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면, 초콜릿을 입에 머물고 있는 듯, 성령께서 말씀으로 음식을 해서 영혼에게 먹이신다.
보령에 내려간 문차영!! 조개구이를 먹다가 갑자기 이강이 생각나서 부른다. 이강은 중요한 회의를 하다가, 사랑하는 문차영의 전화니까, 그냥 받는다. 과연, 사랑하는 주님이 부르면, 그냥 달려가는 것이다. 주님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헤깔리면 안된다. 또 다른 구원의 이름은 없다. 밥먹다가 생각나서 부르면, 주님은 금방 앞에 앉으신다. 그 이름으로 설레고, 애타고, 들끓고,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주 예수다.
본래, 각 사람에게는 주 예수 외에 없었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듯이, 하나님과 사람만 있었다. 그 사이에 옛뱀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창조사역이 잠시 틀어졌을 뿐,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과 아담만 있었다. 모든 성도는 그때로 돌아가야한다. 공장 초기화는 하나님과 나, 예수님과 나,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은 십자가 밑이다. 또한 무덤앞이다. 주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고, 부활하셨으니,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죄인으로서 의인이 된 것을 매일 찬양할지라!!
드라마가 갑자기 복음으로 이해되는 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성령께서 요리를 해줘서 그런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단상의 설교가 이해되는 것도 성령께서 요리를 해주셔서 맛있는 것이다. 성령은 언제 요리할까? 단상에서 말씀이 선포되면서, 성도가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성령의 요리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요리된 성령의 설교를 단상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단상에서 설교하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요리하시니, 말씀의 구원은 100% 성령께서 행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