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정경에 “하나님이 불심판한다”는 예언의 이미지가 많다. 그 중에서 이사야서 66:16 이미지가 매우 강력하다.
[이사야 66:15~16]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
‘불에 둘러싸여’, ‘맹렬한 화염’, ‘불과 칼’의 이미지는 책망과 심판과 죽음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넣어라”고 했다. 이때, 하나님의 심판은 칼집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향해 ‘심판의 칼’을 뽑으신다. 반드시, 죄인을 징벌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칼을 받으시고, 십자가로 ‘칼집’이 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를 통해 영원히 멈췄다. 이것이 불심판의 핵심이다. 십자가를 버리는 자마다 칼이 칼집에서 뽑혀,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칼이 칼집에 들어가면 그때 평강이 온다. 주님은 ‘칼집에 꽂힌 칼’을 무덤속에 장사지냈다.
누가복음 12:49이 대표적인 불심판 성구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12:49)
가령, “내가 이겼다”는 문장이 있다. 자!! 이 문장은 무슨 뜻인가? 앞뒤 맥락없이 “내가 이겼다”는 것만 보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라는 문장도 동일하다. “내가 이겼다”는 문장이 가위바위보에서 사용된 경우, 100m 달리기에서 사용된 경우, 요한복음 16:13에서 예수님이 사용한 경우, 모두 그 뜻이 확실히 달라진다. 문장은 반드시 앞뒤 맥락과 전체 흐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눅12:49~52]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해당 내용은 마태복음 10장에도 나온다.
[마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불세례’다.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이다. 눅12장과 마10장은 불세례 사명에 대해 말씀한 것이다. 이 불덩이가 사람의 심령에 붙었다면, 주님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불덩이가 붙지 않아서, 주님은 답답하시다. 이 불은 무엇인가?
[눅3:16]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1~12]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누가와 마태는 모두 ‘세례요한’의 증거를 그대로 인용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데, 알곡과 쭉정이를 각각 구분해서 태우신다. 알곡과 쭉정이는 모두 사람의 심령속에 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쭉정이는 영원한 불에 타오르고, 알곡은 구분되어서 곳간에 옮겨진다. 인간 알곡, 인간 쭉정이로 생각하면 안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지고 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육신으로는 사망의 법을 섬긴다”고 했다.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쭉정이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마음에 자라는 쭉정이는 이사야서 40장 말씀처럼 하나님의 기운이 불어오면 시들게 된다. (적폐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누가복음 12:49에 나오는 ‘불’은 곧 ‘세례’다. 불세례를 말한다. 12:50에 “내가 받을 세례”가 나온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았다. 이어, 불세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주님은 성령세례를 주실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다. 불세례를 받으심으로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요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16:7]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불’로 심판을 받으셨다. 이것은 불과 칼을 들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간 아브라함의 모형이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듯, 하나님께서 직접 십자가의 칼로서 심판의 불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고, 영원한 구원의 증표를 세우셨다. 이것이 노아에게 약속한 구름속 무지개의 증표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고, 축복이다. 불심판을 통해 성령축복이 성취됐다. 야곱이 모든 우상을 세겜 상수리 나무에 묻고, 의복을 바꿔입고서 엘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재단을 쌓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의 모든 죄는 무덤에 묻혔고, 그리스도를 옷입고 우리는 하나님께 의인으로 나아간다. 십자가는 곧 모든 인생의 창조 초기화이며, 구원의 재창조다. 십자가를 믿을 때만 이러한 은혜가 값없이 주어진다.
십자가를 부인하면,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 수장(水葬)되듯,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헤롯성전이 그대로 멸망당했다.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40년의 기간이 주어졌지만 끝내 십자가를 버림으로 멸망을 자초했다.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요, 불신자에게 패망의 무덤이다.
불심판은 말씀심판으로 지식적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을 수학책으로 보이게 하는 오류가 생긴다. 성경은 구원의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불’의 이미지는 특히 성경 전반적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됐으니, 그 뜻을 인간의 지식으로 가두지 말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버리심으로 분쟁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화목제물’의 대속제사를 영원히 감격해야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듯,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심으로 ‘구원의 생명’을 다시 창조하셨다. 구원의 창시자가 바로 ‘부활의 예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