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어떤 구역 조합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나는 조합원 자격이 없지만, 전문가로서 협력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해, 휴일을 반납하고 참여했다. 재건축, 재개발 분야는 실시간 정보가 업그레이드되니, 언론인으로서 습득하기에도 벅차고, 법률지식도 난해하다. 언론인은 객관성과 사실확인에 있어서 일반인과 시각이 다르다. 그런 전문가의 관점이 필요했던 것 같다.
10년 남짓, 공격을 당하다 보니, 갑자기 끼어든 펀치에도 당황스럽지 않다. “NO”는 강한 반격이다. “왜 조합원이 아닌데, 모임에 참석했는가!!”라는 매서운 질문이 공개적으로 주어졌고, 나를 변호해준 사람은 1명밖에 없었다. “준회원 자격으로 참석했다”라고 누군가 말해주면 간단한 것인데, 그렇게 해준 사람은 없었다.
옛날 같았으면, 나를 공격한 사람을 향해 매서운 화살을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미소를 짓고, “오늘만 참석하고, 다음번에는 의논을 해서 알려주세요”라고 낮은 자세로 포복했다. 내가 나의 말을 스스로 들으면서, “나도 성격이 많이 유순해졌다”라고 생각했다. 조합원들 속에 섞이지 못한 ‘나’는 다리 하나가 짧은 책상처럼 마음이 기울어졌고, 기회를 틈타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날, 나는 동병상련의 화살을 맞고 그곳을 빠져 나오는 어떤 할아버지와 40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우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상처를 받은 우리는 전우애(戰友愛)가 생겼다. 어떤 총회 현장보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작은 모임에서 폭탄처럼 쏟아졌고, 과연 그것은 ‘존경예법’이 실종된 양심의 민낯이었다.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비웃음으로 그 할아버지를 무안줄 때, 벌떡 일어나서 “예의를 지키시죠! 그대의 아버지와 같은 분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인내했다.
그날, 나는 루터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루터는 자신의 원수인 레오 10세를 향해, “다니엘과 에스겔”로 비유하며, 극존칭의 존대법으로 로마 교황청을 ‘바벨론’으로 비유해 편지했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어법’은 현대인의 필수 인격이다. 인격이 없는 자는 벌거벗고 춤추는 것과 같으니,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과거에는 그런 상황에서 ‘보복적 심리’가 발동해서, 그 할아버지와 함께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엉뚱하게, 그 할아버지의 고충을 듣고, 사건을 수습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다시 연결하도록 ‘소금’의 행실을 해냈다. 이게 인생이겠거니, 그렇게 믿으면서…. 양심없는 자는 그 양심이 살아나고, 양심있는 자는 더욱 정의롭길 바라면서…. 그렇게 나는 또 한명의 사람을 사귀었다. 내게 재건축과 재개발은 사람 이야기다.